난, 멀티 디자이너
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여백을 알고, 이해하고, 터득하는 것을 넘어서서,
내가 좋아하는 그림으로 여백이라는 것을 누렸고,
이제는 나와 한 몸을 이룬 듯, 하루종일 함께 한다.
나의 삶에 자연스럽게 파고 들어와 있다.
내 안에 여백의 무한성이 담겨있다
여백이 있는 그림을 좋아한다.
그래서 여백이 있는 그림을 그린다. 가끔은 미완성으로 그림을 마무리 짓기도 한다. 미완성된 채로 남아있는 2018년도의 그림이다. 더 이상 그릴 생각이 없기에 싸인으로 마무리했다.
멈출 때를 알고 멈추는 것이다. 그림에 강함을 줬으니, 여백은 약함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이것은 전체의 조화를 이룬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여기서 만족하는 것이다. 나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스쳐가는 생각이다.
여백이 주는 여유를 즐긴다.
나의 삶이 풍선 같다면, 풍선이 터지기 직전에 한 번씩 바람을 빼주는, 그러한 여행을 계획한다. 그러면, 팽팽하게 긴장된, 터질까 봐 불안하고 어디로 튕겨나갈지 모르는 풍선이 아닌, 여유로운 말랑말랑 풍선이 되어, 다시 어떤 상황이 와도 잘 적응하게 된다. '내 안의 나'와의 관계도 말랑말랑해진다.
장거리 여행이 아니더라도, 오페라하우스에 가는 것과 같은 특별한 하루 외출이라도 하려 한다. 이 또한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카페에 가서 한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다 오기도 한다. 야외테이블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겨울바람을 느끼며 사람구경을 한다. 그러다 보면 또 영감이 떠올라 다시 일을 하게 되기도 하지만, 일단 나의 목표는 '여유를 즐긴다'이다. 내 안에 여백을 만들어주는 시간이다.
여백이 주는 비움을 선호한다.
나는 미니멀라이프를 지향한다. 맥시멈리스트로 살다가도, 가끔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버려야 하는 시기가 찾아온다. 요즘 나의 집이 그렇다. 여러 번의 이사를 통해 뒤섞인 짐들을 정리하고,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은 과감히 버리는 중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나에게 소중한 것들이 한 곳에 모여진다. 그것들을 다시 재정리하면 된다.
나의 삶도 그러하다. 호주로 와서 적응하느라 정신없고, 대학원을 다니느라 못 챙기고, 일하느라 무시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정리 중이다. 나에게 소중하게 남겨질 것들은 무엇일지. 나의 여정이 끝나는 날에 알 수 있을까? 그날이 그래도 빨리 왔으면 좋겠다. 내가 다시 보답할 수 있도록.
그리고 제일 중요한, 나의 마음정리도 주기적으로 하는 편이다. 비움에서 오는 즐거움은, 희한하게도 15년 동안 냄새를 못 맡는 나에게 후각을 느끼게 해주는 마법 같은 선물을 선사하기도 했다. 요즘은 많은 마음정리를 계속하는 중이라 그런가. 한 달 넘게 그 좋아진 상태를 잘 유지 중이다. 나의 코에도 여백이 생겼나 보다. 재미난 상상을 하고 지나간다.
여백이 있는 글을 좋아한다.
여유로운 산책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다. 책도 나에겐 그렇다. 요즘 다시 읽고 있는 <소로의 일기>는 자연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한 줄 한 줄에 많은 의미가 담긴 글이라 나에게 많은 사유를 하게 하는 책이다.
또한, 열린 결말로 끝나는 이야기를 선호한다. 글이 나에게 넘어와 내 것이 된듯한 기분이 든다. '다 읽었으면, 이제 네가 가져.' 저자가 나에게 말을 하는 듯하다. 그러면 냉큼 가져와 내 마음대로 결말을 짓는 것이다. 허락된 자유. 그런 느낌인 것이다.
여백이 있는 관계를 좋아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편이다.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잠깐 물러나서 조용하게 나만의 시간을 가질 때가 있다. 가끔은 조용하게 침묵 속에서 며칠간 나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이는 INFJ의 성향일 수도 있겠다. 만약 내가 싱글이었다면, 정말 나는 '며칠간의 잠적'을 감행했을 것이다. 겨울잠을 자듯, 나에겐 에너지를 축적할 여유로운 시간이 필요하고, 동시에 에너지가 뺏기지 않을 여유 있는 거리감이 필요하다.
아마 오늘이 그럴 거 같다. 새벽부터 '차분함'이 나에게 찾아와 있다. 오늘 내가 같이 놀아야 할 친구인가 보다. 차분함이 가져다주는 여유는 또 어떤 것일까. 그것을 즐기면 되겠다 싶다. (그러니 내가 오늘 조용하게 있더라도 오해하지 말길. 화난 거 아님. 하루종일 잠만 자는 거 아님.)
여백을 디자인하는 북디자이너다.
북디자인은, 특히 내지의 디자인은, 여백을 디자인하는 것이라 했다. 맞는 말이다. 나는 종이의 혹은 스크린의 하얀 여백 공간만을 바라보며 디자인을 한다. 예를 들어, 페이지 사방에 2센티미터의 여백을 주고 글을 배치시킨 후, 줄간격과 글자간격을 조절하고, 글자 안에서의 빈 공간에 또다시 집중한다. 그리고 페이지수, 단락 제목을 얼마만큼의 공간을 남겨주고 배치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지금도 나는 하얀 공간을 보며 글을 쓴다. 언젠가 한 독자분께서 댓글을 남겨주셨다. '작가님의 글은 디자이너분이라 그런가 사진배열도 좋고, 읽기가 편하다.' 이러한 내용의 댓글이었다. 진짜 나는 브런치 북 글을 쓰며 , 온라인에서 발행되는 브런치 북이지만, 나만의 북디자인을 한다는 생각으로 모든 글을 하나하나 정성 들여 디자인하는 편이다. 글을 완성한 후, 혹은 글을 발행을 한 후에 꼭 마지막으로 '디자인 점검/수정'이라는 단계를 거치고 글을 마무리한다. 여기서도 여백을 주로 본다. 강약을 위해. 흐름을 위해.
여백을 만들고 싶다.
앞으로의 삶에는 단순히 넓게 남겨진 여백이 아닌, '나만의 깊이'가 깊어져서 저절로 생겨나는 3차원적인 여백을 위해 공간을 비워두려 한다. 그러면 나의 공간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