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수업을 받은 지 4주가 지났다. 주 1회 수업이니 4번의 수업을 들은 셈이다. 그런데 벌써 석고상(주)을 그리고 있다. 나는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초급반 친구들(할머니, 할아버지 포함) 모두 나만큼의 실력으로 석고상을 그럴듯하게 그려내셨다.
내가 석고상을 처음 시작한 것은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예고 입시를 준비할 때였다. 3년 내내 입시에 나오는 몇 가지 정해진 석고상만을 반복해서 그렸다. 예고에 들어가서는 더 디테일이 많고 덩치가 큰 석고상을 또 3년 내내 그렸다. 이번에는 대학 입시를 위해서였다.
아직도 석고상이 입시 미술에 포함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야 왜 석고상을 그렸어야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그렸어야 했는지도 다시 배우는 느낌이다.입시를 위해서는 정해진 규칙이 있었다. 기준선을 만들어 거기에 맞는 위치에 눈, 코, 입을 배치하고, 이제 가장자리의 윤곽을 잡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배우고 있는 새로운 접근법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기준선이라는 것이 없다. 대신, 나는 나만의 직관을 따라 네모를 만들어 그 안에서 석고상의 형상을 잡아 나간다. 거기서부터 시작해 큰 덩어리를 5-6개의 조각으로 나누고, 세로와 가로의 균형을 맞추며 전체적인 비율을 잡아 나가는 것이다. 이 과정은 나에게 생소하게 다가왔고, 익숙했던 방식을 내려놓고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는 무참히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무너짐은 곧 새로운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그동안 알고 있다고 믿었던 기본조차 잘못되어 있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내가 그동안 배운 것중,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그저 연필을 잡는 방법뿐이었다. 이곳에서 배운 새로운 접근법은 나에게 어떤 석고상이든, 정물이든, 인물상이든 나만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그 기본에는 균형을 잡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문제점을 바로잡고, 큰 그림으로 사물을 관찰하는 것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더 나아가, 이번 수업에서 내가 사용하던 참고 자료들이 1820년대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현재 배우고 있는 이 방법들이 서양의 전통적인 그림 그리는 방식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이렇게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미켈란젤로도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서양의 그림을 서양의 문화 속에서 배우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비로소 미술의 본질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방법을 내려놓고, 새로운 시각과 접근법으로 그림을 대하는 경험은 단지 기술의 습득을 넘어, 나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여정이 되었다. 서양의 전통 속에서 그들의 방식으로 그림을 배우며, 나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문화적, 역사적 체험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이 과정에서 얻은 통찰은 앞으로의 작업에 있어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 믿는다.
(주)
석고상 :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시대의 대리석, 청동 인물상을 석고로 복제한 것의 부분들이며 그 당시의 유명인들이 많다. 소묘나, 석고정물수채화 등의 입시과목에서 따라 그리는 용도로 많이 쓰였다. 그러나 21세기로 넘어오며 너무 획일화된 방법이라고 지양하는 추세. --> 이렇게 설명이 위키백과에 쓰여있다. 너무 획일화된 방법이 아니라, 기본을 배우기 위한 것이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잘못 배운것을 뿐이다. 우리는 입시에서만 사용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