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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낸다 _ 플래너를 버렸다.

by 근아

한때 나는 철저한 계획주의자였다.


여행을 갈 때면 30분 단위로 일정을 쪼개고, 그 계획을 하나하나 지키기 위해 애쓰며 스스로를 압박했다. 마치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이.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세운 계획이 나를 붙잡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마치 강물에 떠 있는 배가 나뭇가지에 걸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듯, 나도 내 계획에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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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도 계획은 없다. 그저 어디선가 받은 영감 하나로 첫 문장을 시작했을 뿐이다. 머릿속에는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하나만 희미하게 자리 잡고 있다. 나를 믿고, 나의 글을 믿고 글을 진행하다보면, 이 글은 자신만의 생명력을 가지고 자기의 글을 만들어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혼자서도 유유히 잘 흘러간다. 그리고 놀랍게도, 글을 다 쓰고 나면,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생각들이 불쑥 튀어나온 것을 발견한다. '내 안에 이런 생각들이 있었나?' 혼자서 놀랄 때가 있다.


내가 계획을 세우지 않고 글을 쓸 때,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힘은 모든 일을 자연스럽게 풀어가도록 돕는, 무언가 더 깊은 차원의 질서와도 같았다. 계획을 세우지 않았기에 가능한 자유로움이 내 중심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어떠한 방향으로 글이 전개된다 해도 나에게는 계획이 없었으니, 모든 결과를 받아들일 여유로움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내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나무에 걸려 멈추어 있던 배가 자연스레 물살을 타고 흘러가듯, 나는 이제 억지로 어떤 것을 성취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과정을 존중하며 그 흐름에 나를 맡긴다.


요즘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모든 일은 자연의 이치대로 흘러간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계획을 세우고 내 능력 이상의 것을 해내려고 애를 써도, 결국 내 능력이 충분히 쌓이고 그에 걸맞은 노력이 더해져야 원하는 성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그 일이 진행되기엔 아직 내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신호다. 그래서 무언가 부족한 점을 먼저 살펴보고 그다음에 진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생각은 결국 '무계획'이라는 삶의 방식으로 나를 이끌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하나의 일을 끝마치면,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문이 내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 문이 자연스럽게 열리며 나를 새로운 길로 안내하는 기분이 든다.


어쩌면 이것은 순수한 아이에게만 보이는 비밀의 문과도 같다. 마치 '토토로'에서 메이에게만 보였던 덩굴길이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펼쳐졌던 원더랜드처럼 말이다. 그 문을 지나면 나만이 알 수 있는 특별한 세상이 펼쳐진다. 이것은 왠지 나에게만 주어진 선물 같기도 하다. 마치 모든 일을 해내고 나면, 내 앞에 마법처럼 나타나는 비밀의 선물인 듯하다. 누군가는 이 모든 것을 특혜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특별하고 의미 있는 일들이 나에게 차례로 다가오는 것은, 내가 걸어온 길의 결실로서 주어지는 마법 같은 보상처럼 느껴진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철저하게 계획된 삶을 추구하지 않는다. 하나의 큰 목표와 사명을 내 중심에 단단히 새기고, 그 안에서 나를 믿고 흘러가는 흐름을 받아들인다. 그 흐름 속에는 진정한 자유와 나의 진실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내가 준비될 때 자연스레 다가오는 기회들을 받아들인다. 계획이 없더라도 내가 원하는 길은 열리고,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기쁨과 성장도 찾아온다. 이러한 무계획의 삶은 마치 비밀의 문을 여는 것처럼 나를 나도 몰랐던 새로운 가능성으로 이끌고, 그 가능성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성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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