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시내에 있는 대사관에 가야 했다.
역 앞 건널목에 서 있던 나는 무심코 길 건너편에 서 있는 두 명의 서양인 남자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들은 마치 하나의 복제된 이미지처럼 내 눈에 동일하게 보였다. 서양 사람들이 한국인과 중국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때때로 서양인들의 외모 차이를 순간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은 그저 흐릿한 인상에 불과하고, 구체적인 차이점은 쉽게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문득 내가 잘 알고 있는 서양인, 나의 영어 튜터 두명을 떠올렸다. 4-5년 동안 영어를 가르쳐준 조셉, 그리고 현재 나와 수업을 함께하는 다니엘. 사실 거리에서 그들과 비슷한 얼굴을 마주칠 때면, 순간적으로 '저 사람이 조셉인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나는 사람의 외모를 잘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의 대화를 더 잘 기억한다. 외모는 그 사람의 일부분일 뿐,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의 목소리, 웃을 때의 표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말하는 방식과 그들의 생각이다. 그들의 외모보다는 그들의 내면에서 그들만의 독특한 개성을 인식하는 편이다. 그들과 나눈 대화 속에서 드러난 삶에 대한 그들의 태도와 가치관이 나에게 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처럼, 1:1로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면, 그들의 외모는 금방 희미해지고, 그 대신 그들의 목소리, 표정, 그리고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생각과 가치관이 훨씬 선명하게 다가온다. 눈에 보이는 외모보다 훨씬 중요한 그들의 '본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고유한 개성을 인식하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그들을 진정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조셉의 차분한 목소리나 다니엘의 밝은 웃음은 그들이 내게 남긴 기억의 중요한 일부분이 된 셈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나는 서서히 깨달았다. 사람을 단순히 '친하다'고 말하는 것은 외적인 모습이나 일시적인 감정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진정으로 아는 것, 그 사람의 본질을 이해하고 느끼는 것은 그들의 내면 깊숙이 담긴 생각과 대화 속에서 드러나는 그들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그들과의 특별한 관계가,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내가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역 앞에서 잠시 스쳐 지나간 이 생각은 나를 다시 '나'에 대해 집중하게 만들었다. '나는 나를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까?' 그 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ㅡㅡ
대사관에 도착했다.
가족관계증명서와 인감증명서 위임장을 발급받아, 공증 도장이 찍힌 두 장의 서류를 손에 들었다. 이 서류들은 마치 나의 현재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 서류 속에는 나의 이름, 나의 나이, 나의 가족, 나의 출생지가 적혀 있었다. 그 속의 정보들은 나의 정체성을 법적으로 증명하는 도구로 작용하는 듯했다.
서류를 들고 있는 순간, 나는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다시 마주했다. 나는 부모님의 딸이었고, 한 사람의 아내였으며, 두 아이의 엄마였다. 이 사실들은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확정된 나의 정체성이었다. 그러나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 서류에 적히지 않은, 그동안 내가 스스로 만들어온 '나'의 모습은 과연 나의 진정한 모습일까?
얼마 전, '큐브'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을 비워내고 있는 과정을 경험했다. 그 글을 통해 나는 나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했다. 서류 속의 정보처럼 외부에서 정의된 내가 아니라, 내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나를 직면하고자 했다. 하지만 서류상의 나는, 깨끗하게 정리된 나의 참모습, 그것은 누가 뭐라 하든 확실한 나였고, 분명한 진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생각에 이르렀다. 이 모습으로 충분하다고. 지금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내가 어떤 사회적 역할을 가지고 있든, 나의 삶에 새로운 나만의 소중한 가치를 부여하며, 법적 서류로 증명된 나 이상의 존재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부심은 내면에서 생겨나는 직접적인 존중이다(중략). 자부심은 원한다고 누구나 가질 수 없다. 자부심이 있는듯 허세를 부려봤자 꾸며낸 노릇은 얼마 못가서 실체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자신이 우월한 장점과 특별한 가치를 지녔다는 확고하고 내젹이며 흔들리지 않는 신념만이 진정한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 - 쇼펜하우어(주)
(주) 커버이미지 & 인용문 : 쇼펜하우어 소품집,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페이지2북스,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