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군지 알아?
첫 직장은 극장이었다. 내가 배운 극장은 서비스업이 근간이었다. 고객 만족을 위해 매뉴얼을 배웠고, 매뉴얼을 유지하기 위해 현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내가 일하던 곳은 주차장이 협소해서 기계식 주차장을 이용해야 했고 주차에 시간이 많이 걸려 대리주차 업체를 통해 고객 주차를 도왔다.
극장에서 발생하는 사건사고 중 가장 큰 사고는 영화가 갑자기 멈춘다거나 정전 등으로 발생하는 영사사고였다. 내가 일했던 지점은 영사사고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이 기계식 주차기기의 고장이었다. 차를 입출고하는 시스템이 안전을 위해 센서로 작동된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 센서가 비 오는 날 오작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었지만 센서가 비 오는 날 습기나 기타 요인으로 오작동을 한다고만 들었다.
슈퍼바이저라는 이름으로 일했던 당시 우리는 무전기를 사용해 일을 했다. 극장이 크기 때문에 현장과 사무실, 그리고 현장에서 현장으로 가장 확실하게 정보 전달이 가능했던 수단이 무전기였다. 무전기를 통해 "주차기기가 멈췄습니다."라는 무전이 흘러나오면 우리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현장으로 뛰어갔다. 주차 클레임이 발생한 것이다. 가뜩이나 기계식 주차장이라 차가 나오는 시간도 다른 곳보다 더 오래 걸리는데 주차장 기기가 멈췄다니... 이건 아주 큰 문제였다.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이 차를 가지러 나오는 시간, 그것도 거의 첫차에서 주차기기가 멈춰버리면...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현장으로 뛰어가면서 다리가 후들거릴 때도 있었고, 심장이 터질 듯이 뛸 때도 있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민첩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민첩한 만큼 차가 빨리 나오지 못했다. 어느 시점을 지나면 고객들이 성향 별로 모인다.
"어쩔 수 없지. 차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지"라는 가장 고마운 고객님
"언제쯤 주차기기가 고쳐지는지 알 수 있나요? 다음 약속을 가야 하는데..."라는 항의 없이 질문하는 고객님
"어쩔 거야! 내가 여기서 낭비하는 시간 어쩔 거냐고!"라는 강성형 고객님...
강 중 약처럼 3단 분리가 된다. 우리도 자연스럽게 3단 분리가 된다. 경험치가 높은 레벨의 바이저부터 중간, 신입 바이저로 나누어진다. 항의 없이 질문하는 고객님은 언제 강성이 될지 모르는 잠재고객이기 때문에 예의주시 한다.
이제 강성 고객들 중 아주 높은 레벨 고객들의 인생사 발표 시간이 온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내 친척이 OO일보 높은 사람이고 내 사돈의 8촌이 OO회사 중역이고.... 너네가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난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다.
주차기기가 작동되지 않아서 죄송하다는 나에게 왜! 굳이 알고 싶지 않은 가족사를 설명하고 그리고 나는 왜 듣고 있는 것인가!
생각해보니 꼭 이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많이 듣는 말이다. 내 얘기가 아닌데 내 가족의 사촌의 팔촌 이야기인데 그들과 동일 시 여기며 본인에 대한 자존감을 높이거나 동일한 위치로 여기는 상황 말이다. 가족이라는 미명 하에 그들의 직위와 위치를 본인과 동등하게 말하여 상대방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심리인 것인가
비가 오거나 습한 날이면 발생하던 주차장 클레임에서 자주 마주치던 일이었기에 나에겐 일종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생겼다.
"저 사람의 자존감은 본인이 아닌 타인에게서 나오는 자존감이다. 본인의 자존감은 매우 낮을 것이다. 나에게 소리치는 강도가 셀수록 더 그럴 것이다."
그랬다.
처음에는 무서웠고 "비 오는 날에 근무 안 걸리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도 한 적이 있었다.
몇 번의 경험 후, 결국 그 사람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 해결책과 그 사람의 심리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 되었다랄까...
주차 클레임 해결의 방법으로 관람한 영화에 대한 환불과 추가적으로 초대권을 준다. 초대권의 경우 해당 지점의 재량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돈에 대한 환불 그리고 그 이상의 보상을 해줬을 경우,
"내가 이거 받으려고 화낸 건 아니야. 우리가 편안하게 영화 보러 왔다가 불편함을 겪으니 화가 나서 그런 거지.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잘 처리하면 좋겠어."
이런 얘기를 하며 초대권을 두 손 꽉 쥐고 간다. 주차기기가 망가져서 신문에 올릴 것이다! 내가 너네 망하게 할 것이다! 하던 강성 고객은 모든 보상이 끝났다는 승리의 미소와 함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승리의 미소인지 아니면 조금은 겸연쩍은 미소인지는 모르겠지만,
경쟁이 심화된 사회이기에 이기는 게 좋은 것이다라는 무의식이 깔려 있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본인도 그 어디에선가 당한 것을 화내도 되는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것인가!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을 때 화낸 거에 대해 미안해하는 건 정말 미안해서 그런 것인가!
사람의 심리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해 본 적은 없지만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건 우린 모두가 조금 급하고, 조금 불같고, 조금 한이 맺혀 있고, 조금 보상심리가 있고, 조금 미안해한다는 것이다.
분명 기분 좋게 영화를 보러 왔다가 정해진 시간에 나가지 못한 것은 화가 나는 일이다. 그리고 기계의 잘못으로만 돌리자는 게 아니라 시설물 관리도 우리의 업무이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 문제가 생긴 것에 대해서는 우리도 진심으로 사과하고 신속히 처리하는 게 맞다. 처리가 늦어지면 당연히 컴플레인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현상에 대한 컴플레인이 아닌 감정대 감정으로 변질되는 것을 많이 봐왔다. 특히나 위와 같이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이해가 되지 않는 말들을 하는 것 말이다.
그 당시의 경험으로 얻은 것은 보상심리가 강하고 자존감이 낮고, 그리고 이기는 방법을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러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 이기고 지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지만.
1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주차기기가 작동이 안 된 것을 신문에 기사를 쓰고 회사를 망하게 할 거라는 그 이유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