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 지우기"
스마트폰을 쓰기 전 피처폰을 쓸 때 전화기를 잃어버리면 기기를 잃어버린 것보다 전화번호를 잃어버렸다는 것에 더 큰 불안감이 있었다. 요즘처럼 계정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유심카드를 이용해 번호를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시기의 일이다.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잃어버린 번호를 찾아서 다시 저장했다. 번호 지우기가 자동으로 됐다. 공연히 자리를 차지했던 번호들 말이다. 지나간 인연, 연락할 일이 없는 인연 등 지울 필요가 있는 번호를 다시 저장하지 않은 것이다.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면서 각종 계정에 연결되었던 번호들이 다시 살아난다. 데이터를 이용한 메신저의 시대가 오면서 이제는 번호와 더불어 메신저 창에 새로운 친구들이 나타난다. 회사를 옮겨 다니면서 구태여 지우지 않았던 번호들과 연동된 메신저 친구들이 늘어났다. 카카오톡 메신저 친구만 몇백 명이었다. 번호가 저장되지 않아도 친구 등록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메신저 친구라는 이름으로 스마트폰을 채웠다.
가끔 아무 생각 없이 메신저 친구 목록을 들여다본다. 일 때문이든 다른 이유에서든 번호가 저장되었기 때문에 메신저 등록된 사람들이다. 한 번의 스크롤로 여러 명이 지나쳐 간다. 의미가 있던 없던 다들 각자의 인생을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 또한 어느 누군가의 한 번의 스크롤로 스쳐가는 사람일 것이다. 풍요 속의 빈곤이라 했던가. 의미 없는 번호들이 유난히 많이 보였다. 이제 차분히 앉아서 하나하나 번호 지우기를 시작한다. 기억 속 메모리의 크기에 따라 지워나간다.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은 사람, 전 회사에서 일 때문에 저장된 사람, 메모리가 작은 번호부터 지워나가다 보면 고민의 순간이 온다. 지우기 애매한 번호 말이다. 직접 연락을 하지는 않지만 엮여 있는 사람들이 많은 사람, 동종업계에 있는 선후배로 언젠가는 만날 수도 있는 사람, 굳이 지울 이유를 못 찾은 사람들 말이다.
신기하게 지워나가고 비워 낼수록 조금씩 홀가분 해졌다. 번호만 지웠을 뿐인데 뭔가 관계를 명확히 세운 느낌이다. 내가 고민 없이 지운 번호는 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사람도 나를 고민 없이 지웠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정리하고 보니 절반이 넘는 번호가 지워졌다. 애매한 번호는 안 지웠다. 애매한 번호도 과감하게 지웠다면 몇십 명으로 줄었을 것이다. 그동안 뭐하고 살았나 싶을 것 같아서 애매한 번호는 그냥 놔뒀다. 그리고 조금은 놔둬야 또 한 번 지우기를 할 것 아닌가.
점점 깊고 좁아진다. 메신저 창을 보면 아주 명확하게 나온다. 여러 개의 대화창이 있지만 일과 관련된 대화창을 제외하면 정해져 있다. 필요에 따라 단체 대화창을 여러 개 만들 뿐 사람은 거의 비슷하다. 정작 대화하는 사람은 좁고 깊어져만 가는데 메신저 친구 리스트는 왜 이리 많았는지...
정보는 점점 풍요로워지는데 그만큼 외로움도 커졌다. 꼭 의미를 부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많은 대화친구들이 있는데 정작 당장 연락할 사람은 없다. 몇백 명 중에 손에 꼽히는 사람 말고는 연락할 사람이 없다. 번호의 수와 기분이 비례한다. 많을수록 외로움의 기분은 더 커진다. 그래서 지우기를 한다.
앞으로도 새로운 사람은 만날 것이다.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다. 좁고 깊은 관계가 될 사람도 있고 누구였더라 하면서 기억을 애써 떠올려야 할 사람도 생기겠지. 그것이 쌓이면 또 번호 지우기를 할 것이다. 그렇게 번호 지우기를 꾸준히 하다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남아있는 번호가 있을 것이다. 그 번호가 나와 함께 끝까지 갈 번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