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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Sep 24. 2024

언젠가는 연애소설



얼마 전 한 출판사 편집자께서, 이경이경, 자네 앞으로 어떤 책을 쓰고 싶은가, 물어보셔서 아, 제가요, 일단은 다섯 번째 책으로 음악 에세이를 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여섯 번째도 에세이를 쓰게 될 것 같고요, 아시죠? 네? 그리고서 일곱 번째 책쯤 되어서는 저도 이제 소설을 다시 써보고 싶은데 말이죠, 하면서 꺼낸 이야기가 몇 가지 있다.


하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문체를 흉내 낸 글을 써서 책으로 내고 싶다는 것. 인정사정 보지 않고 사정없이 중얼중얼중얼중얼 그저 손가락 가는 대로, 쉼표와 마침표의 비율은 아마도 9 : 1 정도로 하여, 끝없이 중얼중얼중얼중얼 해대는, 소위 말하는 요설체의 글을 쓰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살면서 누군가의 문체를 흉내 내어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 일절 하지 않았으나, 묘하게도 이 다자이 오사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의 문체만큼은 보고 있으면 어째서인지 자꾸만 따라하게 된다. 세 번째 책 <난생처음 내 책>에는 순전히 다자이의 문체를 따라 하여 쓴 글이 있을 정도로... 여하튼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요설체의 책을 써보고 싶다 하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중얼중얼중얼중얼.


또 하나는 아주 찌질한 작가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밝혔다. 편집자가 A를 이야기하면 B, C, D... X, Y, Z 까지 상상해 버리고야 마는 완전 찌질하고, 정신이 나간, 병맛이 터지는, 그런 몹쓸 글쟁이의 이야기. 이거야 뭐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그저 내 이야기를 쓰면 그만이지. 근데 이런 병맛 나는 글쟁이의 이야기는 이미 나보다 수만 배 더 유명한 히가시노 게이고나 나카야마 시리치 같은 사람들이 쓴 적이 있으니까 선뜻 엣헴, 한번 써볼까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병맛 나는 글쟁이를 다룬 소설이라니, 흔하다 흔해, 경쟁력 부족. 그렇다면 아싸리 이렇게 된 거 병맛 나는 글쟁이를 다룬 에세이를 쓰자,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으나, 그걸 쓰기엔 저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가 있는 겁니다, 네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한 것이, 이른바 연애소설이다. 십 대, 이십 대의 푸르뎅뎅한 청춘도 아닌 사십 대 아저씨가 써보고자 하는 책이라는 게 연애소설이라니, 가당치도 않지. 하지만 언젠가 연애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데에는 작가 故최인호의 오래전 소망에도 기인한다. 대하소설 역사소설 상업 소설 순문학 소설 신춘문예 이런 종교 이야기 저런 종교 이야기 온갖 이야기를 써 내려갔던 최인호도 마지막까지 쓰고자 했던 게 연애소설이었다는 것을 어디선가 들었다.


아, 그렇구나. 저렇게 커리어가 대단한 작가도 마지막까지 붙잡고 완성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바로 사랑 이야기였구나. 그리하여, 그래 그렇담 나도 언젠가는 알콩달콩 달콤 쌉쌀한 연애소설, 그런 거 한번 써보고 싶다, 하는 소망을 갖게 된 것이다.


"잘 쓰실 것 같아요."


편집자라는 사람들은 글쟁이를 우쭈쭈 해주기 위해서 생겨났다는 듯이.


"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제가 연애세포가 다 망가져버려서..."


한참 뒤의 이야기이니까. 당장 지금 쓰고 있는 책의 원고도 밀어내야 하니까. 소망은 그저 소망일 뿐, 언제 쓸 수 있을지도 모를, 어쩌면 단 한 글자도 쓸 수 없을지도 모를, 그런 이야기를 편집자와 나누었다. 그러고서는 며칠이 지나 정말 내가 먼 훗날이라도 언젠가는 연애소설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이렇게 자꾸만 생각나는 걸 보면 내 안에서 이런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갈망이 있기는 한가 보다. 십 대나 이십 대에 책을 목표로 무언가를 썼다면 그때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사랑이야기를 써 내려갔을 텐데.


아, 사랑과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알고 있다. 아주 오래전 쇼펜하우어가 책을 통해 사랑은 아무리 미화되어도 성욕이 우선이다 하는, 뭐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다. 그런가, 사랑은 성욕인가. 그렇다면 소위 정신적인 사랑을 뜻하는 플라토닉 러브는 개뿔도 아니다, 이겁니까 쇼펜하우어 선생님. 플라토닉 러브와 플라톤의 사상은 거의 상관이 없다고 알고 있지만 어쨌거나 플라톤이 알면 좀 섭섭하겠다 싶다. 아무렴 자기 이름을 딴 사랑의 방식 아닌가.


사랑이라는 게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오로지 성욕에 우선이든, 아니면 정신적인 게 가능한 것이든 언젠가는 연애소설을 써보고 싶다.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들어서인지 어제는 문득 사랑에 관한 책을 하나 들추어 읽어보았다. 누구의 말인지,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사랑이란 범죄는 단독 범행이 불가능한, 늘 공범이 존재한다는, 뭐 그런 문구 위에서 나는 나의 공범을 떠올리며, 두 눈을 끔뻑끔뻑거리고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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