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에도 트렌드라는 게 있어서 뭐 하나가 터지면 비슷한 포맷의 프로그램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은퇴한 운동선수들이 본인의 종목이든 타 종목이든 무언가에 도전하는 프로그램이 부쩍 늘어난 거 같다.
가수나 배우 등 과거 청춘스타들이 나이 들어 주름진 얼굴을 하고서 나오는 방송은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져 보기가 싫었는데, 운동선수들의 모습에서는 연예인보다 좀 더 다양한 모습들이 그려져 흥미롭다. 가령 말도 안 되는 나이에 여전히 말도 안 되는 기량을 선보이며 감동을 선사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은퇴한 지 불과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예전의 기량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는, 저 사람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기도 하다.
요즘에는 은퇴한 야구선수들이 모여 팀을 이루고, 자신들의 종목이었던 야구 시합을 펼치는 프로그램을 한 번씩 보고 있는데, 현역 시절에 어마어마한 기량을 선보였던 사람들이 초보자도 하지 않을 실수를 하거나, 선수 시절에 비해 살이 확 불어난 모습을 보고 있으면 새삼 현역의 아름다움과 자기 관리의 대단함을 생각하게 된다.
아, 저 사람 그동안 빠른 공을 던지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을 했겠구나. 저 사람은 그동안 빨리 달리기 위해서 엄청나게 몸 관리를 했겠구나. 현역에서 물러나 몰라보게 느려진 공과 몰라보게 느려진 몸으로 움직이는 과거의 스타 선수들을 보면서, 그 빠른 공과 그 빠른 몸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었구나, 굉장한 노력과 시간을 들였겠구나 하는 생각에 빠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의 가장 큰 장점으로는 은퇴가 늦다는 게 아닐까 싶다. 운동선수만큼의 노력도 필요해 보이진 않는다. 글이란 생각을 글씨로 표현하는 거니까, 생각할 수 있는 머리와 손가락만 움직일 수 있다면 나이 70이든, 80이든 현역이 가능하다. 그 생각이라는 게 좋은 생각인지 나쁜 생각인지도 차치한다. 그 판단은 독자마다 다를 테니까.
최근 몇 년간에는 노 작가의 에세이를 부러 찾아 읽기도 했다. 테오도르 칼리파티데스의 <다시 쓸 수 있을까>(부제 - 77세에 글을 잃어버린 작가 테오도르)나 도널드 홀의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부제 - 여든 이후에 쓴 시인의 에세이) 같은 책이었다. 늙어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유머를 무심하게 툭툭 던지고 때로는 죽음에도 초연한 모습을 보이는 글을 읽으면서, 나도 이렇게 나이 들어서도 글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역이라는 게 아름다운 것이라면, 글을 쓰는 사람은 오랫동안 아름다울 수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 언젠가 글쓰기를 멈추어야 할 시간이 온다면 그때는 정말 슬프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에서 생각의 기능이 멈출 수도 있겠고, 타이핑할 수 있는 손가락의 기능이 멈출 수도 있겠지. 이렇듯 글쓰기를 할 수 없을 정도의 몸과 정신을 상상하면 살아도 살아있을 것 같지 않다. 만약 몸과 정신이 멀쩡한데도 절필을 하였다면 그때는 어쩌면 아주 심각한 악플에 괴로워하고 있을 때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이래나 저래나 역시 꾸준히 글을 쓸 수 있는 삶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