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팔지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빌어먹을 책들

by 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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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꼭 팔아야지, 팔고 말아야지, 다짐을 했다. 책 이야기다. 읽지도 않으면서 무턱대고 사모으는 책들 때문에 책장은 자신의 자리를 모두 내어주고, 거처를 잡지 못한 책들은 바닥이며, 거실이며, 책상 위에서 방황 중이다.


처가 근처에는 중고서점 알라딘이 있으니까. 오늘은 단 열 권이라도 들고나가 꼭 책을 팔아야지. 몇 년 전 딱 한 번 책을 팔아본 일이 있는데, 양장본의 그래픽 노블은 그럭저럭 제값을 쳐주는 거 같던데. 그러니 한 번 보고서는 다시는 열어보지 않을 것 같은 그래픽 노블 몇 권과 도저히 완독 하지 못할 것 같은 몇 권의 책과 또 만듦새가 엉망이고 재미도 없는 개똥망 같은 책들을 좀 내다 팔아야지 다짐을 하였으나 팔지 못한 것이다.


아, 이건 팔아야겠다 확고하게 마음먹은 책들도 막상 집 밖으로 들고나가려면, 아, 이 책에서 좋은 장면이 하나 있었는데, 아, 이 책은 언젠가 한 번 다시 열어보지 않을까, 아, 이 책을 샀을 때 나한테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 책은 어차피 얼마 못 받을 거야, 하는 여러 이유들이 책 판매를 어려웁게 만드는 것이다. 그게 정말 다시는 열어보지 않을 것 같은 개똥망 같은 책이라도 그렇다. 이렇게나 책을 사랑하는 나인데, 왜 내가 쓴 책은 안 팔리는 겁니까.


사실 책을 내다 팔려고 하면 잠시 저자의 마음을 떠올리게 된다. 그건 끔찍함이다. 누군가 나의 책을 중고서점에 내다 판다고 상상하면 나는 그게 몹시 끔찍하여 견딜 수 없다. 실제로 나는 첫 책을 내고 몇 달이 지나 한 중고서점에 재고로 뜬 나의 책을 보러 간 일이 있다. 새 책이나 다름없던 책은 면지가 잘려있었다. 소문이 사실이던가. 책이 새로 나오면 출판사에서는 '증정', '드림' 같은 도장을 면지에 찍어 언론사에 보낼 테고, 중고서점에서는 최소한의 양심인 것인지 '증정' 책만큼은 거래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몇몇 언론사에서는 출판사로부터 들어오는 책이 너무 많으니까 증정 도장이 찍힌 페이지를 잘라 중고서점에 내다 판다는 소문이 있었다.


면지가 잘려나간 내 책도 그런 연유였을까. 누구였을까. 새 책이나 다름없는 책을, 그것도 아마도 출판사의 증정본이었을 것 같은 책을 내다판 이는. 나는 면지가 잘려나간 책을 보고서는 책을 내다판 이를 상상하며 저주했다. 나쁜 사람. 치사한 새끼. 우환이나 생겨버려라.


아니다. 고작 책 하나 팔았다고 우환을 바라는 것은 초등학생 시절 착한 어린이 상을 받았던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다. 나는 저주를 거둬들이고 홀로 괴로워했다. 중고서점에는 그렇게나 중고책이 많은데, 자신의 책이 중고서점에 있는 걸 보고 괴로워하는 거. 이거 나만 그런 거야? 다른 이들은 아무렇지 않은 거야? 그럼 이거 너무 억울하잖아, 싶다가도 소설가 이기호는 자신의 책이 중고 사이트에 올라온 것을 보고는 직접 판매자를 만나는 내용을 소설로 썼다. 다행이다. 나만 속 좁은 거 아니었구나. 그렇구나. 나는 이기호 소설 속 주인공처럼 판매자를 직접 만날 생각까진 안 했으니까. 이기호 소설 속 주인공은 판매자를 만나러 광주에서 글쎄 서울까지 가더라니까.


최근 한 의사가 쓴 에세이를 읽고 있는데 프롤로그의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이다.

'이 책을 사 주신 독자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서, 책을 사 준 사람만을 콕 집어 가리킨 것이다. 의사 선생님, 좀 세속적이네.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본 사람은 고맙지 않다는 건가요?


출간 후에 SNS에서 알게 된 몇몇 분들은 책을 사지 않고 도서관에서 빌려보았다며, 미안함을 표하는 분들도 계셨다. 천만에. 나도 한 때는 책을 사주시고 예스 알라딘 교보에 별점 만점으로 리뷰 써주시고, SNS에 사진 예쁘게 찍어 서평 써주시고, 심지어 주변인들에게 책 선물해주시는 분들이 가장 고마웠지만, 이제는 도서관에서 빌리든 훔치든 그저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그럼에도 중고서점에 내 책이 팔리는 걸 상상하면 여전히 끔찍하다. 책은 세상에 나와있는 상품중 가장 묘한 물건이다. 읽는 입장에서든 쓰는 입장에서든 만드는 입장에서든 그렇다.


팔아야지. 반드시 팔아야지. 개똥망 같은, 두 번 다시 열어보지 않을 게 확실한, 집에서 자리만 차지하는 빌어먹을 책들. 내다 팔아야지. 굳게 다짐하고도 결국 오늘도 팔지 못했다.


뭐, 책 팔아봐야 그 돈으로 또 책이나 더 사겠냐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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