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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Nov 30. 2022

전화로는 부족한 이야기




사회에 불만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잘 몰라서 엉뚱하게 보일 때가 있다. 공장 출근 첫날이 그랬다. 반바지를 입고서 출근했더니 공장 관리자가 반바지를 입으면 안 된다며 나무란 것이다. 왜 반바지를 입으면 안 되는지는 몰랐지만, 회사 내규가 그러하다니 수긍했다.


그러다가 첫사랑과 헤어지고는 가슴 한 구석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았다. 몸에 다른 구멍 하나를 뚫으면 그 구멍이 메워질까 싶어 귀를 뚫기 시작했다. 처음엔 왼쪽, 다음엔 오른쪽. 귀걸이를 하고서 출근을 했는데, 다행히 남자가 귀걸이를 해서는 안 된다는 내규는 없던 모양이었다.


그다음부터는 조금 용감해져 머리를 건드렸다. 항상 동네 이발소에서 머리를 하다가 ‘월급’이란 걸 받고서는 패션의 메카, 이대 앞에 가서 머리를 하기 시작했다. 회사 어르신들의 눈초리 같은 건 잠시 잊은 채, 당시 유행하던 호일 파마를 해버렸다. 머리를 볶고서 첫 출근을 한 날 부장님은 다 포기한 듯 “잘 어울리네.” 했다. 공장 아주머니들은 아기공룡 둘리에 나오는 마이콜을 닮았다며 재밌어하셨다.


경주에서 대학을 다니던 S는 방학을 맞아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공장에 들어왔다고 했다.  까맣고 긴 생머리의 평범한 대학생. 그게 S의 첫인상이었는데, 며칠 후 S도 빨간 레게머리를 하고 나타났다. 그러니까 <울트라맨이야>를 부를 때의 서태지 머리. 그동안 많은 공돌이, 공순이를 봐왔지만 이런 경우는 없었다. 부장님은 한숨을 쉬었고, 나는 헤어스타일만으로도 친밀감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S는 방학에만 일을 하기로 한 거라 금방 잊힐 인연이었을 텐데, 우리는 그러질 못했다. 머리 예쁘네요, 어디서 하셨어요. 아마 그런 대화로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겠지. 호감을 느끼고 이메일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날 우리는 연인이 되기로 했다. 회사가 쉬는 날이면 같이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손을 잡았다. 가끔 S가 깍지 낀 손에 있는 힘을 꽉 주면 그게 참 좋았다. 작은 손이었다.


작은 손만큼이나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 명동에서 데이트를 하기로 했던 어느 날엔 그 무수한 인파 속에서 나 하나를 찾기 위해 까치발을 들고 기다렸단다. ‘까치발’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는 단어라는 걸 S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몇 번의 데이트와 한 달이 조금 넘는 공장 알바 생활을 마치고 경주로 떠나기 전 S는 비밀을 꺼내듯 말했다. 자신은 운동권 학생이라고. 학교로 돌아가 계속해서 운동을 한다면, 수배를 당할지도 모르겠다고. 살면서 나와는 상관없을 것만 같은 얘기였다. 사실 들어도 무슨 얘기인지 잘 몰랐다. 운동한다는 첫마디에 ‘헬스를 하나?’ 싶었지.


너 혹시, 박해받는 노동자들 해방, 외치면서 노조 같은 거 만들려고 위장취업 했던 거니? 묻고 싶었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러기엔 S의 빨간 레게머리는 너무나 튀었으니까. 어쨌든 ‘수배’라는 단어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주사파란 일주일에 네 번 학교 가는 학생을 가리킨다던 그 옛날 썰렁한 대학가 유머가 장난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네 부모님을 생각해. 그리고 나를 한 번 생각해. 그래도 네가 하는 일이 가치 있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


불안한 마음을 안고 지내야 했지만, 다행히 S가 수배되는 일은 없었다. 우리는 서울과 경주에서 연락을 이어 나갔다. 본격적인 장거리 연애로의 돌입. S는 내게 편지를 써서 보내주었고 먹을 것도 보내주었다. 학생 주제에. 돈도 없으면서. 경주에서만 나온다던 빵도 보내주었다.


지금이야 휴대폰의 무료통화가 흔한 시대지만 그때는 서울과 경주에서 통화하려면 전화비가 많이 나오는 시절이었다. 구로공단 공돌이의 월급은 뻔하다. 전화요금이 부담스러워 야근을 하는 날이면 회사 전화기를 통해 S에게 전화를 했다. 그렇게 우리는 통화로써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S는 가끔 내게 전화로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경주에 한번 내려올 순 없느냐고. 술에 취한 목소리로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두 달 가까이 주말도 없이 공장이 돌아가던 때였다. 그때 단 하루만이라도 경주에 내려가는 버스에 탈 수 있었더라면, 그럴 수만 있었다면 우리는 어땠을까. 미안하다며, 이건 아닌 거 같다며, 다시 술에 취해 걸어온 전화가 장거리 연애에서의 마지막 통화였다.


내가 첫사랑에게 그러했듯, S 역시 자신이 즐겨 듣고 부르던 음악들을 선곡해 시디에 넣어 보내준 적이 있다. <청계천 8가>, <바위처럼> 같은 운동권 현장에서 불린다는 곡들이었다. 살아생전 처음 접하게 되었던 음악들.


그 시디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곡은 꽃다지의 <전화카드 한 장>이었다. 힘들고 지칠 때면 전화를 하라고 손에 쥐어주었다는 전화카드 한 장. 곡에 등장하는 전화카드나 편지 같은 단어들이 꼭 나와 S 사이를 노래하는 것만 같았다. 요즘에도 <전화카드 한 장>을 찾아 듣지만, 꽃다지나 민중가요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알지 못한다. 그럴 때면 S가 나에게 조금 더 알려주고서 떠났어도 좋았을 거란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가끔 또 문득.


한편으로는 참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도 든다. 힘들고 지칠 때 건네주었다는 전화카드 한 장을 노래한 곡을 좋아하면서도 전화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살다 보면, 얼굴을 보고서 이야기 나눠야 하는 순간이 있는 거겠지. 우리에겐 그런 순간이 없었다. 함께한 순간이 너무 없었다. 전화로는 다 전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들도 분명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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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에세이 준비하면서 튕긴 꼭지. 왜 튕겼느냐면... 그게 뭐 그렇게 됐습니다. 살다보면 글이 튕길 수도 있고 뭐 그런 거 아니겠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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