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영 세일 마지막날이라고 해서 미세모 칫솔이랑, 셰이빙폼이랑, 물에 쉐킷쉐킷 타먹는 분말 가루 좀 사서는 느지막이 점심을 먹으러 갔다. 오늘 점심은 여의도에 있는 제주 은희네 해장국.
제주도에 있는 은희네 해장국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으나, 3년 전 제주 여행에 가서도 어디어디로 가면 은희네 해장국이 있다는 표지판만 봤을 뿐, 정작 먹어보진 못했다. 제주에서도 못 먹었던 걸 서울에서 이렇게 먹게 되다니. 서울에 있는 은희네 해장국이 제주도에 있는 그 은희네 해장국과 같은 가게인지, 아니면 이름만 따온 가게인지는 모르겠고, 맛있으니까 일단 먹는다.
가게에 들어가 착석하였더니 아주머니 한 분이 "앞치마 드릴게요."라고 말하고선 과연 앞치마를 갖다 주신다. "앞치마 드릴까요?" 하는 물음표가 아닌 마침표를 찍고서 알아서 챙겨주신 그 마음이 고마웠다. 오늘 나의 상의는 국물이 튀면 와이프한테 혼구녕 나기 좋은 하얀색이었으므로.
제주 은희네 해장국 식사 메뉴는 만 원짜리 해장국과 만이천 원짜리 내장탕이 있는데, 내장탕은 한 번도 먹어보질 않았고, 늘 해장국으로 시킨다. 오늘도 여지없다.
같은 음식이라도 사람들마다 생긴 대로 취향대로 각자 먹는 방식이 다르겠지만 내가 이곳에서 먹는 방식은 이렇다. 해장국을 시키면 국과 함께 조그마한 접시에 다진 마늘이 나오는데 그걸 남김없이 모조리 국에 때려 넣어 먹는 것이다. 마치 동굴 속에 들어가 백일동안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된 곰탱이처럼, 내 오늘 이 다진 마늘을 모두 먹고서 반드시 정신을 차려 앞으로는 사람 구실을 하며 살겠노라, 하는 심정이 되는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다진 마늘을 듬뿍 올리고서 국을 이리저리 섞으면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이 하나둘 보이고 역시나 국 안에 들어있던 양념장이 풀리면서, 국의 색은 점점 뻘겋게 변해간다. 양념장이 안에 미리 들어가 있으니 다대기 얼마나 넣어야 적당할지 몰라 주춤주춤 할 일이 없어서 또 좋다.
그렇게 국이 섞이고 나면 이제 건더기를 하나둘 꺼내 먹는다. 얇게 썰은 고기 입으로 들어가시고오, 배추 들어가시고오, 당면 들어가시고오, 대파 들어가시고오 하다 보면 뜨거워 혓바닥 데일 것 같던 국물도 조금씩 식어간다. 이때가 되면 이제 밥뚜껑을 열어서 국에 넣을 차례다. 백미가 아니라 흑미. 그렇게 밥을 넣어 말으며 국 안에 있던 마지막 건더기를 꺼내 먹는 것이다.
바로 은희네 해장국의 화룡점정이라 생각하는 선지 되시겠다. 은희네 해장국 안에 들어가 있는 이런저런 건더기들이 모두 먹을 만 하지만 한 덩어리 크게 들어간 이 선지야 말로 이 해장국을 특별하게 해주는 것 아닌가 싶다. 사실 선지라는 게 뭐 그리 특별한 맛이 있나. 알고 보면 그저 소의 핏덩어리 아닌가. 다만 이곳에서 먹는 선지는 다른 곳보다 조금 더 단단하고 깔끔한 느낌이어서 뭔가 건강한 맛의 느낌이 난달까.
선지까지 모두 먹고 나면 이제는 국에 말았던 흑미밥을 먹을 차례다. 대부분의 건더기는 사라졌고, 처음에 부었던 마늘향이 뒤섞인 국밥. 옆에 뽀뽀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몰라몰라. 이거 다 먹고는 사람 구실하며 살겠다 이거야.
은희네 해장국 찬으로는 청양고추와 깍두기가 나온다. 혼밥을 하게 되면 보통 청양고추가 두 개 정도 나오는 거 같은데, 아주머니 기분 좋은 날에는 세 개도 주는 것 같다. 두 개든 세 개든 매워서 늘 하나 정도만 먹는 편이다. 나머지 찬인 깍두기는 처음에는 별 맛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괜찮다. 결국 해장국 한 그릇 뚝딱 먹는 동안 기본찬으로 나오는 깍두기 접시도 훌렁 비우게 된다.
그러니까 이곳 깍두기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보자면. 내가 얼마나 소심하고 쫄보인지 이런 식당에 가서 반찬을 다 먹어도, 여기요, 저기요, 익스큐즈미, 이곳에 깍두기 리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는 말을 못 하고 그냥 처묵처묵하는 편인데, 이곳에서는 지나는 아주머니 불러다가 깍두기 좀 더 달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랄까. 물론 정도가 그렇다는 것뿐 실제로는 깍두기를 더 달라고 하진 않고 그냥 먹는다. 그만큼 내가 소심하고오, 쫄보인 사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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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반찬 더 달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워하는 내가 온라인에서 내 책 좀 사달라고 말하려면 얼마나 밍구스럽고 큰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인지 모른다. 거대한 철판을 얼굴에 덮고 일단은 주접을 떨며 농담을 던지는 척 책을 사달라고 말하지만, 그때마다 부끄러워 뒈져버릴 지경이다. 오늘 이 해장국에 섞인 다진 마늘을 모두 먹고서 앞으로는 사람 구실을 하며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다시 이렇게 해장국 처묵처묵한 일을 책홍보로 연결을 짓고야 마는 나는...
이쯤 되면 묻지 않고 앞치마를 챙겨주신 식당 아주머니처럼 다들 알아서 책을 좀 사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