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비와 음악 10화

사랑이 있었던 거라면

채수현 - 멋진밤

by 이경



코로나가 닥치기 전이던 어느 해 저녁, 거래처 사람과 간단히 맥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회사 근처 한 호프집에 들렀다. 젊은 직원들은 술과 안주를 나르느라 바삐 움직이고 있었는데 한 직원의 유니폼에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No Beer No Life'


무엇이 없으면 무엇도 없다는 익숙한 숙어의 형태. 'No Pain No Gain'이 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는 뜻이니, 'No Beer No Life'는 맥주가 없으면 삶도 없다란 뜻이겠구나. 직원의 유니폼에 적힌 내용 때문인지 그날 맥주의 맛은 썩 괜찮았다.


한편 직원의 유니폼에 적힌 문구를 보고서 나는 같은 형태의 또 다른 숙어를 떠올렸다.

무엇이 없으면 무엇도 없다.

무엇이 없으면 무엇도 없다..

무엇이 없으면 무엇도 없다...


내가 떠올린 무엇과 무엇은 사랑과 섹스였다.


No Love No Sex.


대부분의 이들의 그러하겠지만, 육체적인 사랑에 눈을 뜨고서부터는 (그게 가벼운 손잡기이든 혹은 그보다 격렬한 행위이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고, 나는 그 맘쯤 내 멋대로 VS게임의 문제를 내고서는 답을 찾아 헤매었다.


살면서 단 한 사람만 사랑하면서 사는 것과 아주 많은 사람을 만나보는 것.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과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

자연스러운 만남과 누군가의 소개로 이루어진 만남.

AB형의 여성과 그 외의 여성들.

그리고 연애와 결혼.


이런 많은 VS 질문들의 답이 무엇이든 간에, 그 앞에 놓아둔 전제는 '사랑'이었다.

No Love No Sex.

어떠한 행위이든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


시대는 빠르게 변해갔고, 성에 대해 점차 개방적인 사회가 되었다. 클럽 문화가 발달하면서 또 요즘에는 소개팅 어플이 생겨나면서 오직 단 하룻밤의 쾌락을 위한 만남도 흔해졌다. 무엇보다 음지에서는 돈을 주고 성을 사고팔 수 있는 매춘이 있었다. 사창가가 있던 영등포 등지에서 학원을 다닐 때엔 "학생, 놀다 가." 하는 아주머니들의 호객행위를 피해 다녀야만 했다.


이런 많은 유혹 속에서도 애써 지키며 살아온 사랑의 신념이 있다면, 그건 'No Love No Sex' 사랑 없이는 섹스도 없다는 거였다. 그래서 40년 넘게 살아오면서 지금껏 단 하룻밤의 만남을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느냐고 물으신다면...



사랑에 대한 시각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특히 남녀마다 다르기도 할 테다. 예로부터 유교적이고 가부장적이던 한국 사회에서 남성이 아닌 여성이 성을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았을 테다. 그리하여 음악 속에서 사랑을 말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지고지순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쟁취하는 사랑이란 주로 남성들의 몫이었다. 그러다 페미니즘을 위시한 여성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이제는 사랑의 쟁취를 노래하는 여성들도 많이 늘어난 듯하다. 여성들은 더 이상 사랑 앞에서 수동적이지 않고, 때로는 쎈언니가 되어 상대를 윽박지르기도 한다.


이런 시대의 흐름 속에서 2017년 묘한 시각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음악 한 곡을 만났다. 2011년 제22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서 가창상을 받기도 했던 여성 뮤지션 채수현의 <멋진밤>이란 곡이다.


곡에서 화자는 비 오는 날, 한 건물 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와 사랑을 나눈다. 웃은 축축이 젖어들었고, 그 젖은 옷 안으로 그가 스며든다. 붉을 빛을 따라 멋진밤을 보내자며, 나를 스쳐가도 된다고, 나는 견딜 수 있다고 노래한다. 곡 속에서 화자와 상대방의 관계가 어떠한지는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다.


다만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상대방을 좋아해 왔던 것 같다. 아마도 짝사랑에 가까운 감정이었겠지. 그렇지 않고서 오로지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이였다면 굳이 견딜 수 있다고 말하진 않았을 테니까. 어쩌면 지속할 수 없는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스쳐 지날 수밖에 없는 사람. 상대방에게 이미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인지, 혹은 화자의 마음과 다르게 상대방은 그저 쾌락만을 위한 삶을 사는 이었을지도.


이 곡에서 중요한 건 상대방의 마음이 아니라, 상대방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아닐까. 어쨌든 우리는 멋진밤을 보냈고, 화자에겐 '사랑'이란 감정이 있었을 테니까.

단 하룻밤의 스쳐 지나가는 사이였어도 나에게 '사랑'이 있었던 거라면.


붉은빛을 따라 멋진밤을 보내자고, 스쳐 가더라도 견딜 수 있다고. 다들. 다들 그렇잖아요, 노래하는 화자의 모습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건 수동적인 사랑인 걸까, 능동적인 사랑인 걸까. 때로는 이런 VS게임을 멈추어야 할 때도 있다. 나는 채수현의 <멋진밤>에서 수동적이든 능동적이든, 너무나 멋지고 아름다운 사랑 하나를 보았다.


비 내리는 날의 혼란스럽고도 멋진밤의 사랑 이야기는 단출하게 구성된 악기로 느릿하게 흘러간다. 노랫말은 섹시하면서도 체념적이다. 각각의 악기들은 이런 묘한 분위기를 몽롱하고 몽환적으로 이끌어낸다. 붉은 빛의 앨범 커버도 곡과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이 곡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말 끝내주게 멋진 곡인데도 그렇다. 채수현이 작사와 작곡을 했고, 정다운이 편곡과 프로듀싱을 했다.



멋진밤.jpg



붉은빛을 따라 멋진밤을 보내요

스쳐 가도 돼요 견딜 수 있어요


비 내리는 건물에 숨어 온몸이 흠뻑 젖은 채

어두워진 밖을 피해서 더 어두운 곳으로

차가워진 콧등에 닿은 네 숨결이

엉켜버린 손가락 사이로 흐르고

축축해진 옷 안으로 스며든 너를

바라보는 내 눈을 감겨


붉은빛을 따라 멋진밤을 보내요

스쳐 가도 돼요 견딜 수 있어요


You and I had a wonderful night

That night just blowed my mind

We changed the darkness into brightness

I am satisfied that we met


붉은 빛을 따라 멋진밤을 보내요

스쳐 가도 돼요 다들 그렇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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