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비와 음악 11화

타임머신이 되어버린 목소리

3호선 버터플라이 - 헤어지는 날 바로 오늘

by 이경



어떤 음악과 목소리는 타임머신처럼 과거의 어느 곳으로 나를 데려간다.

남상아. 나에겐 밴드 '허클베리 핀'과 '3호선 버터플라이'에서 노래했던 뮤지션 남상아가 그런 사람이다.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엔 신촌에서 자주 놀았다. CD를 살 때엔 지하철 신촌역에서 연세대 가는 길에 있던 '향음악사'에 주로 들렀고, 신촌에서 홍대 방향으로 가는 길에 있던 클럽 마스터플랜에서는 힙합 공연을 즐겨 보았다. 뮤직박스가 있어서 동전 몇 개를 들고 가면 원하는 음악을 실컷 들을 수 있었던 단골 술집 '레지스탕'도 신촌에 있었고.


학창이던 90년대 중후반부터는 홍대를 중심으로 인디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의 탄생과 성장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웠다. 요즘에는 어쩐지 '인디'라는 게 마치 음악의 장르처럼 불리지만, 그때는 정말 인디펜던트 한 뮤지션들이었다. 크라잉넛, 노브레인, 코코어, 앤(Ann), 레이니선, 델리스파이스 같은 밴드들.


기억이 희미한데 신촌 향음악사에서였는지, 클럽 마스터플랜에서였는지 당시 이런 인디 밴드들의 뮤직 비디오를 담은 비매품 비디오테이프를 받은 적이 있다. 역시나 가물가물한 기억이지만, 그 비디오테이프의 첫 곡이 바로 밴드 허클베리 핀의 <보도블럭>이었던 것 같고. 어쨌든 그 비디오를 통해 남상아의 노래를 처음으로 듣게 되었고,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상아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쩐지 젊은 날의 신촌 어딘가를 걷고 있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나에게 가장 빠르고 정확한 타임머신 중 하나가 된 남상아는 '허클베리 핀'으로 시작하여, '3호선 버터플라이'로 적을 옮기고서도 왕성하게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 덕에 '인디' 출신 뮤지션 중에서는 가장 성공한 한 사람 중 하나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특히나 '3호선 버터플라이'의 4집 앨범 [Dreamtalk]는 2013년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이 앨범에 수록된 <헤어지는 날 바로 오늘>이 바로 비와 관련된 곡이다.


비와 관련된 음악 에세이를 쓰면서, 그동안 어렴풋이 알고 있던 이런저런 비의 종류와 관련 단어들을 알아가고 있다.

내리는 빗줄기가 매우 가늘어서 안개처럼 보인다는 안개비. 국어사전에 의하면, 이슬비보다는 조금 굵다는 가랑비와 가랑비보다는 가늘다는 이슬비. 보슬비와 부슬비, 또 여우비. 예로부터 짧고 굵은 사랑의 메타포로는 '소나기'만 한 게 없으며, 오랜 슬픔을 이야기하기엔 '장마'가 제격이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는 삶에서 헤쳐나가야 할 인생의 역경과도 같다. 또 각각의 느낌이 너무나 다른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비들까지도.


3호선 버터플라이의 <헤어지는 날 바로 오늘>은 이런 많은 비들 중에서도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의 헤어짐을 노래한다.


*진눈깨비 - 비가 섞여 내리는 눈(눈비)


비 내리는 날의 이별 장면이라니, 이 얼마나 진부하기 짝이 없는 모습인가. 90년대 댄스 그룹 알이에프(R.ef)도 <이별 공식>이란 곡을 통해 이별 장면에선 항상 비가 온다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남상아가 노래한 <헤어지는 날 바로 오늘>은 이런 클리셰에서 살짝 비껴나간 모습이다. 다른 흔하디 흔한 비가 아니라, 진눈깨비라고! 눈이 뒤섞여 내리는 비!


한국 여성 보컬 중 남상아의 목소리를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유니크한 목소리를 꼽으라면 단연 남상아를 첫손가락에 뽑을 수 있지 않을까. 거칠고 허스키하면서도 어쩐지 슬픔과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 그런 음색으로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의 헤어짐을 노래하니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트랙이다. 처음 발표되었던 해부터 지금까지도 꾸준히 듣고 그럴 때마다 나는 타임머신을 타는 기분이 든다.


그런 남상아의 근황이 궁금하여 얼마 전 인터넷을 찾아보았더니 2019년쯤 프랑스 니스로 이주하였다는 기사가 뜬다. 한국에서는 음악으로 먹고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떠나게 되었다고. 그때 나는 좀 '너무한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했듯 인디 출신 뮤지션 중 가장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한국대중음악상 무려 '올해의 음반'의 보컬 아닌가.


뛰어난 뮤지션이 음악으로 생활이 안 돼서 프랑스로 이주를 했다고 하니, 이건 막심한 국가적 손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뭔가 내 청춘의 한 덩어리를 잘라다가 프랑스로 같이 보낸 기분이랄까.


남상아의 보컬과 찰떡과도 같은 <헤어지는 날 바로 오늘>은 100점짜리 라인의 가사가 연속으로 이어서 나오는 곡이기도 하다. '깊어질 수 없다는 그 거짓말', '너에게 침을 뱉고 싶어지는 이 기분', '하지만 너에게 길을 묻지는 않았네' 같은 라인들이 그렇다. 무엇보다,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노래하는 남상아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남상아에게 하고픈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나에게 가장 뛰어난 성능의 타임머신이 지금 이 나라에 없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전 그날,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남상아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던 허클베리 핀의 <보도블럭> 역시 '비 오는 날'이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남상아는 비와 몹시 잘 어울리는 보컬이었던 모양이다.


남상아.jpg



헤어지는 날 바로 오늘

믿기 싫지만 바로 오늘

진눈깨비가 거리를 뒹구네


헤어지는 날 바로 오늘

너는 모든 걸 빼앗아 가네

진눈깨비가 얼굴을 때리네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매달려봐도 매달려봐도

가지 말라고 제발 가지 말라고

매달려봐도 소용이 없네


진눈깨비 흩어지는 거리에

도망치듯 멀어지는 니 뒷모습

깊어질 수 없다는 그 거짓말

너에게 침을 뱉고 싶어지는 이 기분

하지만 너에게 길을 묻지는 않았네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제발 가지 말라고

오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제발 가지 말라고


진눈깨비 흩어지는 거리에

도망치듯 멀어지는 니 뒷모습

깊어질 수 없다는 그 거짓말

너에게 침을 뱉고 싶어지는 이 기분


하지만 너에게 길을 묻지는






keyword
이전 10화사랑이 있었던 거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