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여덟, 국밥 한 그릇에 반하다

병원에서 나와 처음 만난 진짜 맛의 기록

by 까칠한 한량


쉰여덟, 삶은 여전히 뜨겁습니다


쉰여덟. 이 나이가 되니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글재주도 애시당초 없고 눈도 침침해서 뭔짓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봅니다.


어제 뭐 먹었는지도 가끔 기억 안나는 제 정신들을 흩어지기 전에 제 이야기들을,

제가 만난 밥상들을 차곡차곡 기록하고 싶어서요.



예전의 저는 참 무심했습니다.

밥은 끼니를 때우는 일이었고, 식당은 그저 스쳐 가는 배경 중 하나였지요.

정신없이 앞만 보고 살다 보니, 내 몸에 들어가는 음식이 어떤 온도를 가졌는지 느낄 겨를도 없었나 봅니다.


그러다 덜컥, 40대 후반, 멈춤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병실에 누워 하얀 천장만 바라보던 어느 날, 의사의 한마디가 심장에 박혔습니다.


"1년 정도 남았습니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더군요.

길고 혹독한 수술 끝에 몸은 종잇장처럼 가벼워졌고, 모든 삶이 변해버렸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퇴원 후 식사를 하기 위해 20대때부터 자주 다녔던 오래 된 국밥집에 들어섰습니다.

뚝배기에서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김을 보자 저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뜨거운 국물 한 숟가락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데,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차올랐습니다.


단순한 국밥의 온기가 아니었습니다.


'아, 내가 살아있구나.'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그 뜨거움을 빨아들이며 외치는 것 같았습니다.

철학책 수십 권보다, 그 국물 한 숟가락이 제게는 더 큰 위로이자 살아있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날의 국밥 한 그릇은 제 삶의 나침반을 완전히 돌려놓았습니다.

국밥집에서 경험한 음식의 온기에 매료된 저는,

그 후로 전국을 세 바퀴는 족히 돌며 진짜 음식의 맛과 그 안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각각의 밥상에서 만나는 따뜻함과 위로를 경험하고 기록하는 일,

그것이 제게는 삶의 새로운 의미가 되었지요.



깨달았습니다. 내일의 막연한 행복보다 중요한 건 오늘의 현실, 지금의 온기라는 사실을요. 화려한 밥상보다 지금 내 옆 사람과 나누는 국물 한 그릇이, 그 온기를 건네는 일이 세상 가장 소중하다는 걸 말입니다.


본능에 충실하게, 오늘에 집중하며 사는 것. 그게 '잘 사는 것'이더군요.

그래서 '까칠한 한량'이 되기로 했습니다. 맛없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지 않듯,

마음 없는 관계와 시간으로 삶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제가 하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골목에서 만난 수많은 밥상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을 기록해두는 것뿐이에요.

사실 처음엔 그냥 제 기억 때문이었어요. 나이가 드니까 자꾸 잊어버리거든요.



그런데 쓰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혹시 제 글을 읽은 누군가가 쓸쓸한 저녁 골목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제가 받았던 그 위로를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 말이에요.


다음엔 제가 아끼는 오래된 밥집 하나를 소개해드릴게요.

그저 숟가락 하나 들고 편안한 마음으로 따라와 주세요.




한 수저의 온기는, 계속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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