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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바래다주던 곳,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30년, 세월은 흘렀지만, 평창동 ‘절벽’은 그대로였다

by 까칠한 한량

20대 때,
가끔씩 가던 포장마차가 있었다.

평창동 올림피아 호텔에서 북악터널로 오르던 언덕길,
육교 밑에 있던 조그마한 포차.
겨울이면 하얀 입김이 섞인 소주잔이 부딪히던 곳이었다.


그 동네에 살던 여친을 데려다주려다
헤어지기 싫어 한잔, 두잔 하다 보면 새벽이 되어 있었다.
새벽에야 여친을 들여보내곤 늘 다음 날이면
그 어머니께 혼이 나곤 했다.
그게 다였지만, 참 따뜻한 시절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육교도 사라지고 포장마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나는 그 여친과 10년간의 연애의 종지부를 찍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키우며 살아왔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며 그 기억마저 희미해졌다.

그 길을 수십 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오르내리며
그 시절을 완전히 놓아버린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 포장마차가, 그 아래로 내려와 아직도 영업 중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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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도 그대로였다. ‘절벽’.

그 이름만으로도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곳을 다시 찾았다.


건물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 몇 걸음,
문을 열자 낯익은 냄새가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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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 냄새, 구운 고기 냄새, 그리고 사람 냄새.
홀 안은 벌써 손님들로 가득했다.

벽마다 지난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다.
손님들이 남긴 메모, 낙서, 사진들.
그 안에는 각자의 추억이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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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할머니가 직접 장사를 하셨지만
이젠 조카분이 가게를 이어받아
벌써 18년째 지키고 계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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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자마자 나오는 건 양배추와 초장.
그 단출한 조합이 포장마차의 시작을 알린다.




돼지구이와 오징어탕을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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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구이는 불향이 가득했다.
가격은 14,000원,
요즘 세상에선 보기 드문 넉넉한 양이다.



오징어탕 16,000원은 무와 잔새우가 듬뿍 들어가
얼큰하고 달큰하면서도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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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입 먹는 순간,
20대 때의 내가 술잔을 기울이던 그 밤이 떠올랐다.

밥 한 공기 말아 먹던 기억,

그때의 웃음,
그 시절의 친구들.

반찬이 없어 계란후라이를 추가했더니
무려 네 개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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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에 이렇게 후한 인심 보기 힘들다.

이곳은 이미 42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시간은 흘렀지만
맛도, 넉넉함도, 정만은 그대로다.

메뉴판 뒤에는 여전히
그때의 나의 20대 포장마차 사진이 붙어 있다.
불빛 아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천막,
가벼운 주머니로도 행복할 수 있었던 시절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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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그 시절의 내가 그 안에 앉아 있는 듯했다.
세상은 많이 변했지만
절벽은 아직 그 자리에 있다.


그것만으로도 괜히 마음이 놓인다.

이런 게, 진짜 포장마차다.


절벽 서울 종로구 평창문화로 130, 귀빈예식장 건물 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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