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누구를 위한 행동이었나?
책에 필기를 하려다 문득 깨달았다. 누군가 집에 와서 내 책장을 뒤지며 책을 골랐을 때 그 책에 붙은 포스트잇에 빼곡한 나의 속 빈 감상평을 슬쩍 훑으며 나에게 긍정적 인식을 하나 추가하기를 무의식적으로 바라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글도 어쩌면 남들에게 보여줄 훗날을 무의식적으로 의식하고 적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쓸 때는 최대한 내 생각을 손상 없이 텍스트로 옮기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여러 표현방식을 통해 내 생각을 정교하게 표현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사실은 여러 표현방식을 통해 글을 적는 이유는 어쩌면 언젠가 타인에게 글을 보여주며 '내가 이 정도로 섬세한 사람이다'라는 점을 어필하려는 이유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습관은 중학생 때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다니던 수학 학원 강사는 나를 인간으로서 대우를 안 해줬다. 여러 사건들을 다 적으면 내가 나를 2차 가해하는 것이기에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더 이상 어떠한 비난에도 자극이 없게 되었다. 2년 동안 나의 자존과 인격을 깎아내리는 말을 귀에 달고 살았기에, 내 마음의 굳은살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두꺼워져서 드디어 언어적 가해에도 끄떡없는 강철멘탈이 된 것이다.
하지만 2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습관에 인이 박이게 되었다. 아직도 이 습관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게 된듯하다. 내가 깨어있을 때 저절로 때리는 멍이자 자고 있을 때 제풀에 꾸는 꿈은 오직 타인을 상정하고 나의 말과 행동을 상상하는 것 외에는 없다.
상상하며 혼자 머릿속으로 드라마를 찍는다. 인물에게 원하는 대사를 요구하면 불만 없이 곧이곧대로 실행한다는 점에서 속전속결로 진행된다. 그런 상상을 하면 재밌어서 웃고, 웃는 모습을 주위사람들이 볼까 봐 눈치를 본다. 여러 영양가 없는 상상중에 매력적인 대사나 소재가 하루에 한두 개 정도 생긴다. 나는 이를 밤에 침대에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리고 글도 써보고 슬퍼도 해본다. 그러다 잠에 들면 아침엔 까맣게 잊고 또 반복한다. 이를 주제로 '요란한 번민: 충동'이라는 시도 지은적 있다.
결국 내가 상상하는 것을 시로 지어서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궁극적 목표였던 것 같다는 점에서 항상 타인에게 귀결되는 내 행동과 생각에 대해 짜증이 난다. 이제는 나의 내부로 시선을 집중시키고 성찰을 하며 묵묵히 살아갈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