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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현 Jul 25. 2020

007_우리에게 따뜻함을

입김이 얼어 목도리에 서릴 정도의 날씨에

여름과 나는 아파트 단지를 헤맸다.

우리는 영화를 찍기 위해 섭외가 가능한 집들을 찾아 헤맸고

관리사무소의 냉대를 받으면서 섭외를 위한 전단지를 붙이고 다녔다.


여름이 찍는 영화는 

한 소년이 하얗게 눈이 내린 운동장에서 토끼를 죽이고

아주 먼 길을 걸어서 토끼를 땅에 묻어주는 영화였다.

그리고 소년은 긴 복도의 끝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문 너머의 무언가를 보고는 다시 토끼를 죽이게 된다.


그 소년이 여름의 마음이라는 건 너무 당연해 보였으나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손과 얼굴에 감각이 없을 때

우리 손에는 더 이상 남은 전단지가 없었다.

여름은 핫초코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 겨울에도 핫초코를 파는 가게를 찾기는 어려웠고

나는 핫초코 가루를 사서 나의 자취방에 가자고 했다.


그때 나는 여름을 좋아하고 있었고

여름은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작은 냄비에 물을 끓여서 핫초코를 타고

두 개의 컵에 나눠 마셨다.

우리는 보일러를 가장 따뜻하게 틀고

외투를 벗지도 않고 앉아서 이불을 덮었다.

그게 그때 우리의 가장 큰 호사였다.


금세 여름은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나에게도 졸음이 쏟아졌으나 나는 마냥 잠에 빠져들 수 없었다.

옆에 있는 여름의 얼굴을 보면서

쏟아지는 졸음 속에서

많은 것들이 뒤섞였다.


어떤 기억은 나의 것이기도 했고

어떤 기억은 여름이 나에게 이야기해준 것이기도 했고

어떤 기억은 토끼를 죽인 소년의 것이기도 했다.

 

그때 우리는 미래를 걱정하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여름의 기억과

여름의 마음이었다.

여름은 그때 무엇을 걱정했을까?

나는 그것에 대해 알지 못했으나

많은 눈이 내리길 바랐다.

영화를 찍기 위해서는 하얗게 눈이 내린 배경이 필요했다.

그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었고

나는 세 평짜리 자취방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장소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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