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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현 Aug 21. 2020

016_반지하의 수모들

보일러는 겨울에 얼어붙는다


여름이 이사 간 반지하 투룸.

그 건물은 


B1 - 여름의 보금자리

1F - 젊은 부부

2F - 노부부

3F - 옥탑방 원룸 두 개, 각각에 청년 한 명씩


이렇게 구성되어 있었다. 

그 건물에서 유일하게 여름의 집만 반지하이자

보일러가 바깥에 노출되어 있었다. 

현관문을 열면 바로 보일러가 보일 정도로...

당연히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이면

그 보일러는 얼어붙는다. 

그 당연한 사실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가 스스로 깨달아야 했던 모양이지만.


반지하 집에 살기 시작하고 일주일 후였다.

낮 동안 여름은 보일러를 끄고 외출을 했고 

저녁에 돌아와 보니 보일러가 켜지지 않았다.

얼어붙은 보일러를 녹이기 위해 이불을 두르고 뜨거운 물을 붓고

온갖 난리를 쳤는데 보일러에서 물이 새기 시작했다. 

한번 얼었던 보일러 내부의 무언가가 녹으면서 터진 것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보일러 수리기사는 내일 오겠다고 했고,

건물주에게 전화를 걸자 건물주는 성질만 냈다.

이 건물주라는 분은 고령의 할머니였는데 

절대로 정말 절대로 남의 말을 안 듣는 사람이었다.

다른 집에 살던 아저씨가 집주인이 가보랬다며 왔지만

그분이 물이 새는 보일러에게 해줄 일은 없었고, 안타까워하며 다시 돌아갔다. 

우리는 냉한 방에서 전기장판을 켜고 일단 잠을 잤다.


다음날 보일러 수리기사가 와 보일러가 완전히 고장 났고

어차피 보일러 수명이 오래되어 부품 구하기도 어려운 터라

새로 교체를 해야 한다고 했다. 

건물주에게 사정을 설명해주십사 보일러 수리기사님께 전화를 바꿔드렸는데

보일러 수리기사가 똑같은 내용을 몇 번이나 전달했는데도 건물주는 당최 듣지를 않았다.

그러니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멀쩡한 보일러가 갑자기 그렇게 터질 리가 없고

그건 필시 거기 사는 아가씨가 뭘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우리가 건물주에 대해 몰랐던 또 하나의 사실은 

건물주가 돈에 아주 인색한 사람이라는 사실이었고

건물주는 어떻게든 보일러 교체비용을 여름에게 모두 전가하기 위해 그렇게 되물었던 것이었다.


건물주가 현장에 나타났고

여름과 보일러 수리기사와 건물주 간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집을 소개해준 부동산 사장님까지 소환된 데다가

옆에 있던 나까지 껴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건물주는 정말 무서울 정도로 다른 사람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고

같은 내용을 수십 번은 되물었으며

결국 모든 대화를 아가씨의 잘못이라고 결론 내었다.

우리는 정말 처절하게 건물주를 설득했으며

(나는 그 과정을 글로 옮겨 쓰기가 두렵다)

그래도 건물주가 부동산 사장님의 이야기만은 들으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보일러 교체 비용을 여름과 건물주가 반반씩 나눠 내기로 했다.

(교체된 보일러는 새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쓰던 중고였다)


나는 옆에서 세입자와 건물주간에 일어난 보일러 분쟁에 관한 정보들을 한참 찾아봤지만

명확한 사실을 찾지 못했고,

결국 우리는 날 때부터 건물주인 사람은 없다, 즉 이런 돈들을 모아 모아 건물주가 되는 것이라며

우리도 보일러가 터진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빌미를 제공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도 더 이상 앞으로는 건물주와 이런 긴 대화를 나눌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변기는 여름에 역류한다


그러니까 변기가 막혔다.

반지하에 살면 변기에 휴지를 버리면 안 되는 거였다.

그 당연한 사실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가 스스로 깨달아야 했던 모양이지만.


어느 여름날 변기의 물이 잘 내려가지 않아

여름은 내게 SOS를 쳤다.

나는 각종 도구, 페트병과 옷걸이와 고무로 만들어진 압착기 등을 이용해

열심히 변기를 뚫어줬다. 

몇 번은 물이 시원하게 내려가기도 했는데

언젠가부터는 아예 물이 내려가지 않고 다시 넘치기 시작했고

나의 허접한 도구로는 전혀 사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건물주에게 전화를 하고 건물주는 더욱 심하게 성질을 냈다. 

곧, 건물주가 부른 동네에 있는 설비업자 분이  

유연한 철근 같은 것을 모터로 내려보내는 장비를 들고 나타났다.

변기를 뜯어내고 그 기계로 한참 관을 뚫고 있는데 

설비업자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이상하다, 이상하다라며..

우리는 더욱 강한 불안에 점점 빠져갔는데 

알고 보니 오래된 건물이라

위층에서 내려오는 모든 오수관들이 반지하 앞에서 합쳐지고 

그 오수관은 건물을 180도 정도 ㄷ자로 빙 돌아서는 건물 옆 정화조로 내려가는 구조였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복잡한 구조 덕분이지 관이 제대로 뚫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어찌 됐든 설비업자 분과 기계의 힘으로 당장 물이 내려가긴 했고,

우리는 불안했지만 일단 화장실을 쓰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가 외출을 하고 돌아왔을 때, 

반지하의 화장실은 정화조에서 역류한 배설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니까 찰랑찰랑 당장이라도 거실로 넘어올듯한. 

정화조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듯했다. 감히 날 건드려?


차라리 우리의 배설물이라고만 생각이 들었다면 덜 억울했겠지만

이 모든 배설물들이 이 건물 사람들 모두의 배설물이라고 생각하니

구토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도 우린 살기 위해 그것들을 퍼서 버리고 퍼서 버리고 

제발 살려달라며 다른 집들에게 호소하는 호소문을 붙였다. 


변기에 다른 것을 넣지 말아 주십시오. 

잠깐 물도 내리지 말아 주십시오.

반지하에서 배설물이 역류합니다.


우리와 건물주는 이번에는 언성을 높이며 싸웠고

역시 아가씨가 뭘 잘못해서 그렇게 된 거라며

우리는 와서 이 꼴을 한번 보고 그런 말을 하라고 하며

결국 정화조 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를 부르게 되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정화조를 청소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수십 년은 쌓였을만한 아주 오래된 무언가 들을 

제거한 후에야 변기가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으며

나는 그분들에게 절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건물주가 현장에 나타났고

아가씨가 살고 난 후부터 이런 일들이 생긴다며

이번만큼은 돈을 못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또다시 한번

여름과 정화조 청소업체와 건물주 간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결국 집을 소개해준 부동산 사장님까지 소환된 데다가

옆에 있던 나까지 껴서 한참을 이야기하다

(물론 전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건물주를 처절하게 설득해서)

결국 절반씩 비용을 부담하기로 했다.


그 후로 우리는 한동안 화장실을 아예 쓰지 못했으며

그러고도 물을 내릴 때마다 강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되었다. 

아마 이사를 다시 나오기까지 화장실을 마음 편히 이용하지 못했다고 할까...

그때의 일들, 간단히 축약했지만 실제로는 일주일 넘게 벌어졌던 일들에서

보고 들었던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불쾌한 것이었고

나는 여름도 그럴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우리는 아주 중대한 실수를 했다.

건물주에게 바로 돈을 지불하는 게 아니라 내야 할 월세에서 

그 금액을 까기로 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건물주가 청소업체에 돈을 지불하고 

우리는 앞으로 내야 할 몇 번의 월세를 내지 않기로 합의한 것인데

그 내용을 공증을 받거나 녹음을 하거나 문서를 만들어 사인을 하지 않고

순진하게 구두약속만 했다.

이걸로 인해 우리는 건물주와 마지막 싸움을 스스로 불러오게 됐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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