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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현 Aug 18. 2020

015_이삿날 1 : 원래 그런

여름이 살던 곳은 영등포시장 옆에 붙어있는 주상복합 오피스텔이었다. 아래에 있는 상가들은 너무나 오래되어 사람이 있을까 싶은 곳들이었고 여름이 살던 방은 전면이 통유리 몇 개로 이루어져 겨울이면 살을 베는 듯한 추위가 밀어닥치는 곳이었다. 아무리 보일러의 온도를 높여도 방은 따뜻해지지 않고 수명이 다한 전구를 갈지 않아 늘 어두컴컴했다.


여름은 그곳을 떠나기 위해 다른 동네의 반지하 투룸을 구했다. 같이 살게 된 고양이를 위해 조금 넓은 곳을 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가구가 없어 단출한 짐을 용달차에 싣고 출발하려는데 그 방에 이사 오는 중년의 여성이 우리를 붙잡았다. 수명이 다한 전구를 갈아놓고 가라고. 여름은 자신이 이사를 올 때도 전구를 갈았다고 했고, 중년의 여성은 원래 이사 가는 사람이 갈아놓고 가는 거라며,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말씨름을 하다가 여름은 그냥 차에 타버렸고 용달 아저씨는 빨리 가자고 소리를 냈다. 나는 여름 몰래 아주머니에게 3만 원을 주고 용달차에 탔다.


용달차 안에서 고양이는 내내 울었다. 좁은 케이지 안에서 차의 진동을 느끼기 버거웠을 것이다. 여름과 나는 말없이 창 밖을 보며 지나치는 무수한 서울의 집들을 바라보았다. 저 중에 우리가 살 집이 없다는 걸 신기해하면서. 여름이 계약한 반지하 집은 난장판이었다. 이사를 나간 사람들이 기본적인 청소도 하지 않아 먼지 구덩이에다 가구가 놓여있던 자리마다 곰팡이가 슬었다. 노란 장판은 곳곳이 찢어져 있었다.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물으니 원래 이사 오는 사람이 알아서 하는 거라며, 우리는 원래 그런 것들이 왜 이렇게 많냐고, 왜 세상은 원래 그런 것뿐이냐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방 한편을 치우고 짐들을 쌓아놓고 여름에게 나의 집에 가자고 했다. 여기서는 아무도 살 수 없다며.


왜 그 집을 계약했냐고 물었을 때 여름은 방을 보러 갔을 때는 좋아 보였다고 했다. 사람이 살던 흔적들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고. 그래,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우리는 데코타일과 벽지와 페인트를 샀고 매일 나의 집에서 여름의 집으로 출근했다. 다행히 집까지 멀지 않아 우리는 동네의 작은 천을 따라 걸었다. 고양이에게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하고 손을 잡고, 천을 걷고, 돌로 만든 징검다리를 건너 반지하 집에 들어가 청소를 했다. 먼지를 닦고 곰팡이를 긁어서 없애고 페인트칠을 하고 장판을 다시 깔았다. 어쩌다가는 짜장면을 시켜먹고 다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매일 조금씩 하다 보니 2주가 흘러갔다.


그때의 시간들은 내 마음속에 오래 남아있다. 사과를 입에 물고 나서는 아침의 공기, 늘쩡거리며 걷던 하천, 강물에 반사되던 햇빛, 눈부심, 언제가 꽃을 피울 앙상한 가지들과 그 옆을 지나던 이름 모를 사람들, 빵의 향기, 징검다리를 건너는 여름의 걸음, 다리 중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간들. 걸레로 타일을 닦아가며 조금씩 채워가던 바닥과 페인트의 냄새. 그때 듣던 음악들. 


우리는 2주 동안 우리의 세계를 만든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에게는 별 일 아닐 것들일 테지만, 우리가 머물 곳을 우리 손으로 일구어낸 것처럼. 물론 그건 2년의 시간제한이 있는 세계였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정 위에 올라가 있는 세계. 그래도 그때까지 우리는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고, 마침내 깨끗한 장판 위에 누워서 우리의 일들을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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