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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현 Aug 29. 2020

018_이삿날 2 : 밑바닥

사람의 희로애락은 

평상시에는 자신의 평균치에 수렴해있다가

특별한 사건과 사람에 의해서 

최저로, 혹은 최고로 요동친다. 

감정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사랑의 역할이기도 하고

또는 사랑 때문에 그런 감정이 가능해지기도 한다.


여름은 반지하 방에서 2년을 살았다. 

보일러가 터지고, 변기에서 똥물이 역류하는데도

2년을 버텼다. 

여름은 대학생을 위해 마련된 전세대출로 집을 얻었고,

다른 곳으로 옮기면 대출이 없어졌기 때문에

버텨야만 했다. 


남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건물주와는 여러 가지 일들이 더 있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실 건물주가 아니었고, 건물주의 어머니로 건물을 관리해오던 것이었다.

집 앞에 쓰레기를 쌓아놓거나, 밖에 내놓은 물건이 없어지거나,

집을 수시로 두드리고는 안에 들어온다거나

그런 건 그래도 견딜만했다. 


계약이 만료되던 시점에 나는 여름에게 우리가 같이 살 집을 구하자고 했다.

당시 내가 싸게 이용할 수 있는 전세대출이 있었고, 

나머지 돈은 우리 둘이 어떻게든 합쳐서 마련해보자고 했다. 

이삿날을 정했고 이제 그 집에서 벗어날 수 있음에 여름은 기뻐했다. 



그리고 이삿날이 되어 집에 있던 짐들을 실어냈고, 

마지막 잔금을 치를 때가 되었다.

전기세와 가스요금, 수도세 그리고 밀린 월세나 관리비가 있다면 마지막 정산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여름과 건물주가 각기 이야기하는 금액이 달랐다.

건물주는 우리에게 통장을 던지며 여름이 내지 않은 월세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신이 다 확인해봤다며, 거기에 다 나와있다고 했다. 

여름은 자신의 애플리케이션을 들며 자신이 입금한 내역에 대해 말했다.

서로 그럴 리가 없다며 언성을 높였고, 

부동산 사장님과 나는 옆에서 건물주의 통장과 여름의 애플리케이션을 대조해보았다. 

그러니까 몇 개의 입금은 여름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몇 개의 입금은 102호라는 이름으로 입금이 되어 있었다.  

그것만 맞추면 일이 쉽게 해결될 거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저번에 합의한 정화조 청소비용이었다. (이삿날 1 참조)

당시 반반씩 비용을 지불하기로 해 몇 개월치 월세를 안내기로 했었는데

건물주는 이제 와서 그런 일은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지난 일들을 다시 들먹였다.


"아가씨 때문에 손해가 이만저만 아니야.
보일러에다 정화조에다. 
다 아가씨 오고 나서 이모양이라고.
나는 그 돈 못 줘. 못준다고."


"왜 말을 바꿔요.

그놈의 똥물 때문에 집에 몇 주를 못 들어갔는데.

그게 왜 우리 잘못이에요.

약속한 거잖아요."


그렇게 언성을 높이며 싸우던 건물주가 여름의 어깨를 팔로 밀었고

여름은 지지 않고 건물주를 밀었다. 

그리고는 둘은 소리를 지르면서 몸싸움을 했다. 

나는 가운데 끼어들어서 싸움을 말렸는데

그 와중에 부동산 사장님의 벙찐 얼굴이 보였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은 얼굴.

나에게도 양 옆에서 손이 뻗쳐 나오고 소리를 질러대는 이 광경이 너무 낯설었다.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여름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둘 사이를 떼놓았고 여름을 안고 있었다.

여름은 나한테 안긴 채로 울었다. 

입에서는 여전히 욕이 흘러나오고,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조금 진정이 된 후에 나는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졌다.

그냥 모든 게 지긋지긋해졌다.

그래서 부동산 사장님께 부탁해서 건물주를 설득해달라고 했다.

둘 사이에 의견이 다른 금액은 그냥 5:5로 나누고 말자고 했다. 

건물주가 동의해 정리를 하고 우리는 차를 타고 겨우 그 집을 빠져나왔다. 

차에서 여름에게 물었다.


- 왜 그렇게 화를 냈어?

- 그러고 싶었어. 지금까지 참았었거든. 

- 그랬구나.

- 친절하게 대할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해야 할까. 난 아닌 것 같아.

- 그래, 네 말이 맞아.


내가 없었더라도 여름이 그렇게 화를 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아닐 것 같다.

내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여름은 자신의 밑바닥까지 소리를 지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사랑이 우리의 밑바닥을 보게 해 준다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일 수 있는 것 같다.

누군가와 싸울 수 있는 용기와 분노까지도 가능케 해주는 게 사랑인 듯싶다.


우리는 그 집을 열심히 꾸몄었다. 

집을 꾸미고 나서는 우리의 세계를 만든 것처럼 기뻐했다.

그리고 바로 여러 가지 시련들이 우리에게 닥쳤다. 

어찌 됐든 우리는 또 하나의 언덕을 같이 넘었다.

두 손을 꼭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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