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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현 Sep 06. 2020

021_특별하게 특별하지 않은 날

여름과 무주에서 있었던 일.


우리는 1박 2일 휴가를 얻어 덕유산 국립공원 근처의 게스트하우스를 가기로 했고

숙소를 예약하면서 숙소에 있는 반딧불이 체험 코스도 같이 예약했다.

사실상 무주에 가는 가장 큰 이유가 반딧불이를 보기 위함이었다.

때는 가을이었는데 시외버스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체크인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산에 먼저 올라가 보기로 했다.

여유롭게 계곡물에 발도 담그고 중간에 나타난 절도 구경했다.

사진도 찍고 떨어지는 낙엽들을 보면서

평온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무주는 멋진 곳이었고 즐거운 휴가가 될 것 같았다.



   산 중턱쯤에서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께 전화를 했다. 반딧불이 체험 코스의 시간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 정확한 시간을 알고 싶었다. 전화를 받은 사장님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아, 30분 안에 오셔야 돼요. 제가 그때 이후로는 나가봐야 되거든요."

라고 말했다.

   우리는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떨다가 사장님께 사정을 해보았으나 사장님은 완강했다. 그 이후로는 어렵다. 그게 사장님의 최종 통보였다. 여름은 그날 반딧불이를 꼭 보고 싶다고 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여름이 먼저 뛰기 시작했다. 올라오는 데에는 2시간 정도가 걸렸고, 뛰지 않고서야 당연히 30분 안에 내려갈 수는 없었다. 같이 온몸이 땀범벅이 되도록 뛰다가 나는 조금씩 뒤쳐졌다. 중간쯤 오자 나는 더 이상 뛰지 못하고 걸었고 여름은 정말 초인적인 힘을 내며 앞에서 뛰어갔다. 나는 여름에게 먼저 가라고 말했다. 먼저 가서 사장님을 붙잡아달라고. 그렇게 숨이 넘어가도록 뛰었지만 시간은 30분을 넘겼고 거의 40분 만에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한참 앞서가던 여름이 게스트하우스에 먼저 들어갔기에 나도 게스트하우스로 뛰어들어갔다. 게스트하우스는 2층에 있었는데 여름은 입구에 있는 의자에 널브러져 있었다. 여름이 울먹이며 말했다.

   "사장님, 먼저 갔대."

   여름은 날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 억울하고 분하고 아쉬운 뭔가가 잔뜩 여름에게 돋아난 모양이었다. 그렇게 우리가 울고 있으니 안 쪽에서 털이 길고 나이가 많은 푸른색 고양이가 한 마리 나왔다. 우리를 위로해주고 싶은 모양인지 우리 옆에 털썩 와 앉았고 여름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마음을 추슬렀다.



   그리고, 잠시 후에 사장님이 나타났다. 어디론가 가버린 줄 알았던 사장님은 땀범벅에다 눈이 퉁퉁 부어있는 우리를 보더니 미안해했다. 일이 있었는데 다시 돌아왔다며, 같이 나가자고 말했다. 우리는 사장님한테 화가 났던 기억들을 모두 날려버리고 기뻐서 사장님의 차에 올라탔다.




   그때가 저녁이 되기 전 오후였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반딧불이를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사과농장이었다. 사장님은 오늘 여기에 왔었어야 했다고, 우리에게 사과농장 못 봤죠? 구경 좀 하세요 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 뵙는 사과농장의 젊은 부부 사장님과 인사를 했다. 집 앞마당에 크게 지어놓은 작업장에서 사장님 부부는 수확된 사과를 박스에 옮겨 담고 있었다. 농장 사장님이 심심하시죠?라고 말하며 같이 사과를 따러 가자고 했다. 집 뒤에는 작은 규모의 사과나무 농장이 있었고, 우리에게 바구니와 집게를 나누어 주었다. 잘 따시면 사과드릴게요라고 웃으며.


   화를 낼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는 그 자연스럽고 정겨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열심히 사과를 따서 바구니를 채웠다. 사장님은 가끔 와서 우리를 보고 가더니 잘 닦은 사과를 우리에게 주었다. 사과는 정말 크고 달콤했다. 사과를 따고 나서는 고생했으니 집에서 식사를 하라고 했다. 엉겁결에 집에 들어갔더니 사장님 부부의 어린 아들과 할머니가 있었고, 집안에서 어색한 대화들을 나누며 같이 밥을 먹었다. 밥은 특별할 게 없는 나물과 계란과 된장국 같은 것이었으나 하루 종일 뛰고, 울고, 일을 했더니 아주 맛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날이 어두워지자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은 반딧불이를 보러 가자고 했다. 차를 타고 산속 깊은 곳에 들어갔다. 차 옆으로 빛이 하나 슝 지나갔고 와, 반딧불이다 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이후로 반딧불이는 더 나타나지 않았다. "원래 여기가 잘 나오는 곳인데 다 들어갔나 봐요." 사장님은 겸연쩍게 웃었다. 일단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달빛 외에는 없는 숲이었고, 풀벌레 소리와 나뭇잎이 바람에 부대끼는 소리가 들렸다. 약간 경사가 있는 곳에 농사를 끝낸 논들이 펼쳐져있어 멀리까지 아래가 내다보였다. 사람의 빛이 없는 낯선 세상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사장님은 차 트렁크에서 풍등을 꺼냈다.

   "자, 이거 잡아봐요."

   여름과 나는 양쪽에서 풍등을 잡았다. 사장님이 라이터를 주었고 아래쪽에서 불을 붙여보라고 했다. 몇 번 라이터를 탁탁거리며 켰고 아래쪽에 불이 붙자 풍등이 두둥실 떠올랐다. 여름과 나는 풍등을 잡고 그 불을 보고 있다가 손을 놓았다. 풍등은 기우뚱거리며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사장님은 옆에 서서 우리들의 모습을 카메라로 찍어주었다. 풍등이 날아서 점점 점이 되어갔다. 우리는 끝까지 그 풍등을 지켜보았다.



특별할 게 없는데도 특별한 날이 있다.

추억을 남기려 애쓰지 않았을 때가 더 좋을 때가 있다.

그날 무주에서의 일들이 그랬고, 우리는 그 날의 일들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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