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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현 Sep 11. 2020

022_소실되는 시간을 위하여

잠이 오지 않아 휴대전화에 저장되어있는 연락처들을 ㄱ부터 ㅎ까지 살펴봤다.

학교를 함께 다녔던 많은 이들의 프로필 사진이 결혼식과 아기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떤 친구의 프로필에는 비슷하게 다른 아이 셋이 활짝 웃고 있었다.

우리가 만나지 못했던 시간 동안 새로운 생명들이 자라고,

헤아릴 수 없는 일과 감정들이 태어났다 사라졌다.


문득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여름이 자고 있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내게 남은 건 오직 여름뿐이다.

나의 모든 일과 감정을 기억하는 이.

어쩌면 내가 모르는 것까지도 기억하는 사람.


띄엄띄엄 시간을 두고 만나는 이들에게는 해야 할 이야기가 많다.

그래서 많은 이야기를 생략하고 축약한다.

내게 가장 멋지거나, 슬프거나, 괴로웠던 일들을 모아 내 삶이 그러했노라고 말한다.

내가 들을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야기다.

상대의 삶이 그러했구나 추측만 할 수 있는 이야기.


여름과 나는 매일 같이 시간을 보낸다. 해야 할 이야기는 많지 않다.

하루치의 일과 감정은 아무리 쌓여도 금방 털어낼 수 있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자연히 말이 없어진다.


여름과 내가 보낸 시간들은 매일매일 그렇게 쌓인다.

그건 조금씩 쌓여 정말 길고 먼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을 절대로 축약하고 싶지 않다.

축약하면서 생략되고 사라져 버리는 시간들도 내게는 너무 소중하다.


하지만 언젠가 시간이 흐르고 나면

여름과 내가 보내는 이 시간들도 간단히 축약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인간은 잊기 위해 태어난 동물이고

결국엔 여름과 보냈던 시간을 그때는 그러했노라 라고 말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나는 글을 쓰는 수밖에 없다.

소실되는 시간들을 위해서, 그 시간을 좀 더 붙잡아 놓고 싶어서.

이 순간들이 잊히지 않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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