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세울 건 없지만, 부끄러울 것도 없어

by 박상환

20년 넘게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있다. 대학교 다닐 때부터 알고 지냈는데, 학번으로는 내가 위지만 나이는 동갑이라 친구처럼 지내곤 한다. 코로나 때문에 가까운 곳에 살면서도 만남이 쉽지 않았는데, 얼마 전 오래간만에 만나 회포를 풀었다.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고 갔다. 남자들이 대개 그렇듯 스포츠 얘기, 여자 얘기, 그리고 먹고사는 얘기. 그게 그렇게 힘들 줄 몰랐다는 얘기. 술자리는 어느새 웃픈 얘기들의 잔칫상이 된다.


둘 다 나이로는 학부형이 되어도 모자랐을 나이이지만, 아직 총각 신세라 최근엔 만나면 결혼에 대한 얘기도 꼭 하게 된다. 참 이상하게 하지 않으려 해도 하게 된다. 술자리에서 결혼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순간이 즐거웠던 술자리가 씁쓸해지는 순간이다. 넉넉지 않은 형편과 불투명한 미래가 술잔에 투영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거의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애매한 내려놓음이 둘 사이에 공통된 생각이었다. 꼬리를 무는 넋두리 중에 그 친구가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나는 내세울 건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부끄러울 것도 없어요"


무슨 심정으로 한 말일까? 진정한 자신감의 표현일지, 혹은 억지로 쥐어짠 자기 위안일지.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친구가 무심코 내뱉은 말은 당분간 아니 앞으로 꽤 오랫동안 나의 모토이자 슬로건이 될 것 같다. 사실 정말 맞는 말이다. 조금은 부족한 경제력 빼고는 우리에겐 부족한 것이 없다. 우리가 살면서 대단히 뛰어난 업적을 이룬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욕먹을 짓을 한 적도 없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소리는 못 들어도 "나는 저렇게 살지는 말아야지"의 삶은 아닌 것이다. 우리 인생. 이 정도면 족하지 않은가. 그리고 내겐 앞으로의 날들도 많이 남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내세우는 것을 참 좋아한다. 자기가 가진 것을 내세우고, 알려진 자기 이름을 내세우고, 남들보다 조금 높은 자기 위치를 내세우고, 아무것도 없으면 자기 자존심을 내세운다. 그러다 보니 내세우지 않고 조용히 있는 사람들이 마치 바보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그토록 내세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거라도 안 하면 금세 부끄러워지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