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미니멀리즘

: 아홉 번째 이사를 목전에 두고

by Auntie J

오후 늦게까지 바쁠 테니 뭐라도 먹고 시작해야 한다. 가능하면 커피도 마셔두고.

대충 아침밥상을 정리할 즈음 어김없이 부지런한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이 들이닥친다.

능숙하고 친절하게 “이거부터 드시고 시작하세요!” 자양강장제 드링크 한 병씩을 건넨다.

단번에 정신을 번쩍 차리기 위해 나도 원 샷!

이사 전 날, 어느 집에서든 내가 살던 그 집에서의 마지막 밤은 항상 잠을 설쳤다. 커피에 자양강장제까지, 이 정도 카페인이면 30분 안에 정신이 확 들기 마련. 드디어 시작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총 열일곱 번 이사. 그중 여덟 번은 결혼 이후. (아! 곧 한번 더 이사가 확정됐으니 결혼하고 아홉 번이요, 도합 열여덟 번.) 쉽게 계산해 결혼 이후 평균 2.3년마다 한번 이사를 한 거다.

그중 가장 오래 거주한 집이 4년 정도, 그리곤 1년도 안돼 움직여야 했던 집도 있다. 또 이삿짐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6개월, 1년, 급하게 오가느라 수시로 싸고 푼 규모 있는 보따리들까지 합한다면 결혼하고도 족히 열서너 번은 넘게 세간 싸고 풀기를 반복했다. 뭐든 많이 하면 좋은, 그런 건 따로 있고, ‘이사’만큼은 누구에게나 힘들고 번거로운 일. 오죽하면 어느 날부터 포장이사가 당연해졌고 이사 전, 후 청소 서비스까지 생겨 났을까. 그런데 많이, 자주, 반복해서 하다 보니 뭐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별 게 아닌 게 또 ‘이사’다. 나한텐 그렇다는 것이다.


이유인 즉, 짐이 없다.

큰 시간 들여 싸고 풀고 정리할 짐이 많지 않다. 아무리 둘러봐도 별 게 없다.

있어봐야 생필품. 최소한의 가정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물건들. 딱 그렇다.


쓸데없이 욕심에 차 구입하고는 사용하지 않고 쟁여두고, 순간 동해서 버리고, 바꾸고 그러지 않았다. 이 정도면 사용하던 물건을 잘 간수하고 탈없이 잘 써왔다 스스로를 칭찬할만하다. “간결, 깔끔, 담백!” 반면 “빈 티 나고, 지저분해 보이며, 유행에 뒤떨어져 보인다!”가 친정엄마의 우리 집 세간에 대한 평이다.

1998년 산 투 도어 LG 싱싱 냉장고(결혼 이후, 한 번도 바꾸질 않았다), 1996년 산 김장독 김치 냉장고(친정엄마가 새 모델로 바꾸면서 잽싸게 짚어옴), 2000년 산 식탁(역시 가구를 바꾸는 집에서 얻어옴). 굵직한 세간에 대한 설명은 여기까지. TV, 세탁기, 에어컨, 옷장 등등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집 전체가 타임캡슐에서 나왔구나 싶어 지긴 한다.

물론 유행 지난 물건을 처분하지 않는 것이 번거로운 이삿짐 정리에 큰 도움을 주는 건 아니다. 이렇게 덩치 큰 살림들 때문에 이삿짐을 싸고 푸는 게 번거로워지는 게 아니니까. 진짜 문제는 공짜라니 여기저기서 받아오고, 유행 따라, 혹은 가격이 저렴해서, 나름의 이유 있는 충동구매로 사들여 곳곳에 쳐 박아 놓은 다양한 종류의 잡다 구리, 오종종한 물건들 때문이다.

이사를 할 때야 비로소 알게 되는 존재들 말이다.


처음부터 이동식 살림살이를 선호했던 건 아니다.

결혼하고 첫 2년 동안, 남편의 10년 자취방 짐들과 신접살림이 합쳐지고, 곳곳에서 답지하는 결혼 선물들이 좁은 집구석구석에 쳐 박힐 즈음, 육아와 일, 가파른 전셋값 상승을 이유로 친정 집에 들어가 살게 되면서 자동 정리가 한 번 있었다. 그리고 이후, 여러 이유로 이 곳 저곳 옮겨 다니면서 마치 자연 진화설처럼, 필요에 의해 발명이 나오는 것처럼 이유 없는 물건들이 내 공간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알게 되었다. 좁은 곳에서 넓은 곳으로 이사를 하는 경우는 짐 줄이기 방면 진화가 불가능하다. 사용을 하든 안 하든 어디고 척척 쌓아두면 될 일이니. 허나, 나처럼 좁은 데서 좁은 데로, 때론 수납공간도 없는 더 좁은 곳으로,

혹은 일 년만 살 곳으로, 삼 년 만 살 곳으로 움직이다 보면 자연스레 홀가분해야 바로 떠나고, 도착하고, 또 보따리를 싸는 게 가능해진다는 걸 알게 된다.


그래도 신기한 건 언제 어떻게 쌓이기 시작한 건지 잡다한 물건들은 어김없이 늘어나기 마련.

결혼 후 10년이 지날 즈음, 없으면 반드시 후회할 줄 알고 끝까지 싸 들고 다니던 생활가전, 가재도구들을 대 방출했다. 결혼 초 선물은 받았으나 한 번이라도 차분하게 써볼 엄두를 못 낸 100가지 기능은 있을 것 같은 믹서, 엄마인지 이모인지 구입자 본인은 사용하지 않으나 아까워 버리지는 못하겠고, 너라도 쓰라며 슬쩍 떠 넘기길래 덥석 받은 요구르트 제조기, 역시 그런 도깨비방망이, 집에서 빵 굽는 냄새를 기어이 맡아보겠다며 야심 차게 구입했으나 일 년에 두어 번 돌리면 다행이었던 미니 제빵기, 여기에 드디어 박스가 낡고 헤어지기 시작한 각종 사은품 냄비, 물병, 접시 세트들에 누가 다니던 회사인지 끝까지 밝히지 못했지만 창립 기념일

로고가 선명히 박힌 찜통까지. 한번 찾아내기 시작하니 가속도가 붙어 온 집안을 들어낼 판이었는데 장롱 구석에 끝까지 쳐 박혀만 있던 원앙금침 앞에서 잠시 스탑. 일 년에 한 번도 꺼내 덮지 않아, 무거워, 덮는다 하더라도 세탁은 어찌할 것이며, 그러다가도 천에 쓸모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결혼하며 해온 건데 가지고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몇 번을 딸막거리다 과감하게 처분하자에 한 표. 더불어 언제 다시 한번 입어볼까 싶은 결혼식 한복들까지 죄다 정리했다. 그리고 마지막, 다른 건 몰라도 끝까지 끼고 살아야 할 것 같던 책들 마저 아름다운 곳에 싹 다 넘기자 더 이상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그 후부터였겠다.

물건을 구입하거나 받을 일이 있으면 실용성과 필요성, 그리고 무엇보다 무언가 가지고 싶은 욕망 때문에 물건을 탐하는 것인지 아닌지 내 마음을 충분히 확인한다. 한창 쌓였던 무수한 물건들이 하나하나 기억할만한 소중한 감정과 이야기를 지닌 물건들이 아니었다는 걸 알기에 조금만 주춤하면 결정이 수월해진다. 남들은 물건에 더해진 감정을 정리하면서 담백하게 사는 법을 배운다고 하는데 난 어쩔 수 없이 내 몸이 편하고자 하다 보니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것 같은 삶이 돼버렸다. 물건에 감정을 과하게 실어 공간의 균형을 잃는 것도 문제지만 나처럼 별 집착이 없어 뭐든 너무 쉽게 정리하는 것도 딱히 바람직해 보이진 않는다.


뭐 이유야 어쨌든 결론은 비슷한 거 아닌가. 지저분하지 않고 구석구석 꽉 차 있어 답답하지도 않고.


그나저나 아홉 번째 이사가 목전이다.

아무래도 21년을 같이 산 냉장고를 이번엔 바꿔야 할 것 같다. 야채고 과일이고 얼기가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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