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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ntie J Aug 06. 2019

소소한 나의 자기 계발 목록 : '줄줄줄'

 

바깥일을 하든 안 하든, 세상 모든 엄마는 어쩔 수 없이 주부.

다른 식구들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보고도 못 본 척했다’에 한 표, 혹은 보여도 ‘그게 어때서, 그래서 어쩌라고’ 하며 그냥 지나쳤다 에 백 표) 온갖 잡일 거리들이 엄마인 내 눈에는 기막히게 들어오는데(이 놀라운 능력에 과연 감사해야 하는 건지), 주말 아침, 내 눈에 딱 걸린 건 마루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양 사방으로 굴러다니며 이 발 저 발에 차이고 있는 책 한 권. 꼴이 처량하지만 어느 한 사람 제자리를 찾아 줄 생각은 없어 보이고...

‘그래, 내가 치우고 말지..’ 테이블 위에 놓는데 그 책. 제목이 가상하다.

<초보 혼 족의 슬기로운 경제생활, 1인 가구 돈 관리>.

아! 초보 혼족이라.. 1인 가구? 우리 집에서 책을 보면서까지 돈 관리를 해야 할 사람이 누굴까..

보나 마나 아직까진 혼자 살겠다는 결심이 공고해 보이는 딸. ‘따님의 책’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걸 굳이 책으로 배워야 하나.


“왜, 혼자 살면서 부자 되려고?”


“혼자 살 거니까 돈부터 관리해야지.”


“근데 그걸 꼭 책까지 보면서 배워야 하냐?”


“습관! 열심히 책 봐야 잘 산다며! 그래서 죽어라 책만 보고 살았더니 일단 뭐든 책부터 찾는 거지 뭐.”


훅 치고 들어오긴.. 하기야 내가 뭐라 할 처지는 아니다.

부딪히며 현장에서 배우는 게 진짜라고 말은 그럴싸하게 하지만 모자란 자신감은 책을 뒤적여야 채워진다고 믿어온 걸까. 나 역시 뭐라도 시작하면 도서관에서 책을 죄다 쓸어와 탑부터 쌓는다. 아직도 가끔 이 패턴이 이어질 때가 있어 스스로가 약간, 아주 약간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어찌 됐든 딸내미가 세상살이 험난한 건 모르고, 넙죽넙죽 돈 받아 쓰는 일만 할 줄 아는 속 빈 강정이면 어쩌나.. 가끔 걱정했는데 스스로 살아 낼 걱정도 하는구나 싶어 다행.

물론 인생이란 게 예상한 대로, 준비한 대로 풀리는 게 아니라서 문제지만.


과연 뭘, 얼마나 잘 알려 주려나…

웬만큼 막강한 홈쇼핑에도 흔들리지 않던 멘털이 슬쩍 기울면서 한 장, 두 장, 넘겨보는데 생각보다 내용이 진지하다.


먼저 돈을 못 모으는 습관을 점검하고, 곳곳에서 절약하는 방법, 돈이 잘 모이는 구조까지 제시한다. 거기에 기본 금융상식과 보험까지 넘나들며 열심히 모아보자, 그러니 파이팅! 전반부가 모으고 지키는 방법이라면 후반부는 좀 더 과감해져 <투자>를 거론하는데 나에게도 생소한 외화 투자부터 적은 돈으로 시작할 수

있는 주식투자까지 두루두루 성실하게 다룬다.

내용이야 그럴 줄 알았지만 어조가 매우 단호하고 진지해 결심할래, 말래, 자연스럽게 자기 검열로 빠져들게 만든다. 사회생활 20년 짬밥의 주부에겐 기본적인 내용이지만 20대 초반 젊은이들에겐 새로울 수도 있겠네… 하며 뒤적이는데, 갑자기 ‘쿵!’


<가장 수익률이 좋은 투자, 자기 계발>.

그렇지! 맞는 말이지! 젊은 시절 몇 푼 남기겠다고 별별 궁리를 하느니 뭘 해도 확실히 남을 자기 계발! 그거지!!

적극적인 어투에 도전적인 제안이 한가득이다.

‘자격증을 따든 전문가의 강연을 듣든 책을 읽든 나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데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고…

이런데 쓰는 돈은 소비가 아니라 투자라고 본다’며 현실적으로 연봉을 올리는 자격증, 학위는 반드시 따고 ‘현재 직종에서 미래가 안 보인다면 조금이라도 젊을 때, 퇴근 후, 주말을 이용해 부수입으로 연결될 만한 기술을 배우는데 투자할 것이며…’


아… 이 즈음 밀려오는 회고와 통찰의 쓰나미.


난, 맹세코, 책에서 제안하는 그 어떤 방법도 일을 하면서 실천해 본 적이 없다.

결혼 전엔 퇴근 후, 하루가 멀다 하고 술독에 빠져 ‘웬수’(당시 친정엄마가 나를 부르던 호칭)로 살았고, 술독에서 헤어 나와 개과천선해 ‘인간’으로 살 즈음부턴 밤, 낮을 가리지 않고 일만 했다. 그리고 어떤 준비도 없이 새로운 직종을 넘나들며 ‘맨 땅에 헤딩’을 밥 먹듯 해왔다.

당시 나보다 인생을 좀 아는 것 같은 부류들처럼 연애를 질릴 만큼 해 보지도 못했고,

인생 길게 보고 ‘자아’를 찾기 위해서 여행을 한다거나 나만의 시간을 갖는 여유로운 방황도 누려보지 못했다. ‘책’은 열심히 읽었으나 현실적으로 자격증이나 학위를 따는 데 필요한 책들은 아니었고, ‘기술’로 전향할 수 있는 직업이 무엇인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 시도조차 안 했다. 그런데, 그래도 죽기 살기로 바빴다. 어영부영 살아왔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물론, 거기까지가 ‘내 능력’이었다. (‘내로 남불’류의 인간들은 나 같은 사람에게 남들은 일 할 거 다 하고, 놀 거 다 놀고도 자기 계발을 한다던데 너는 뭘 했냐.. 할 거다. 나는 딱 이 정도, 요 수준이라 ‘일’만 하고도 나가떨어지는 부류 였소다! 만.. 그러는 당신은?)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세상에서 하필 그런 부류였던 거지. 그러나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다.

열심히 ‘일’ 했지만 ‘더 나은 일’ 까지는 안 풀려 ‘열심히 일만’한 인생도 수두룩하고, 자격증 따고, 학위 따고, 전방위로 노력했지만 얼마 못 가 잘린 인생도 있으며, 몇 년을 ‘자기 계발’이라고 했으나 전혀 상관없는 일만 하고 사는 인생도 부지기수다. 그리고 나처럼 일만 해도 집에 돌아오면 뻗어 기절인데 자격증에, 학위에, 부업에, 기술에 등등의 자기 계발까지 하라면 바로 입원 행일 사람도 있는 거다.


전혀 그럴듯한 변명이 아니라고…? 구차하고 비루해 보인다고?

하지만 이건 진짜, 레알 사실이다.

드라마는 드라마고, 영화가 영화일 뿐인 것처럼 ‘인생’도 그냥 그런 거다.

그리고 너나 할 것 없이 찍어 낸 듯 기막히게 시간 관리를 잘하고, 본인의 장단점을 분석해 꼭 맞는 자기 계발을 해내며 더 나은 커리어를 만들어 예상한 대로 착착착해낸다면.….

생각만 해도 답답하다. 나처럼 나사가 하나, 둘은 풀어진 족속들이 있어야 자기 계발로 재미 본 사람들이 더 빛을 볼 수 있긴 하겠으나… 아… 이 즈음 쓰다 보니 재취업을 꿈꾸는 입장에 적당한 마음가짐은 아닌 듯하여 이만 총총.


추가 1.) 혹시라도.. 활자라면 우선 믿고 보는 나의 딸 님! 자기 계발, 너~무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한데요,.

너무 부지런히, 체계적으로, 전략적으로, 열~심히 산다고, 다 잘 살아지는 건 아니더라고요. 뭐든 다 할만하니 하는 거고, 못 하는 덴 다 이유가 있는 거고요. 그러니 작정하고 스스로를 너무 들들 볶진 마세요!!


아쉬움이 남아 추가 2.) 반 백 년 세월 동안 해낸, 뽐내기에 충분한, 나의 자기 계발 목록!

① ‘돈’을 많이 버는 재주는 없지만 알뜰살뜰 잘 쓸 수 있는 능력

② 사람들과 ‘눈치’껏 잘 지낼 수 있는 능력

③ 누구보다 탁월하게 인내심을 갖고 공공장소에서 줄 서기,

빠르고 정확하게 재활용품을 분리수거할 수 있는 능력…..

‘줄줄줄’ 더 늘어놓으라면 못 할 것도 없지만 여기서 줄임의 미학.

이런 류의 자기 계발을 가족이나 마을이 자랑스러워하는 것 까진 바라지 않음. 그저 소소한 나의 ‘줄줄줄’들이 자기 계발로 인정받고 언젠가 빛을 볼 날이 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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