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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ntie J Oct 28. 2019

반 백 살 취준생의 집사 생활


오늘 만 다섯 통화째다.

엄마의 첫 통화는 약 먹는 순서를 잊으셔서.(너무 센 진통제를 드셔야 해서 위를 보호하는 약을 같이 드셔야 하는데 이게 식전인지, 식후인지, 하루 한 번인지, 두 번 인지 매번 헛갈려하신다) 두 번째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로 시작하셨다. 그러나 결론은 ‘왜 너희들은 전화를 하지 않느냐’.. 서운함이

폭발하셨다(항상 먼저 전화하시니 전화할 타이밍을 놓쳤다고 말하는 수밖에) 그렇게 오전이 지나가고 점심 즈음 세 번째 전화다. 약은 잘 먹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이 정도면 거의 두 시간 간격으로 전화를 하고 계신 거다. 네 번째는 이번 주 친정에 언제 올 건지, 그리고 방금. 이번 주엔 반드시 마늘을 갈아야 하니 잊어버리지 말라고.

세 번째 통화를 마칠 즈음 잠깐 고민했다. ‘만약에 전화가 또 오면 받지 말아야지.’ ….

그러나 연달아 오는 전화도 아니고 혹시라도 노친 네 혼자 계시다 넘어져 다급한 전화면..

혹은 예상 못한 일에 혼자 당황하고 계시면… 이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스치면 건너뛰기가 쉽지 않아 진다.

전화 만으로라도 위안을 드리고 든든함을 보장할 수 있다면 하루 100 통화라도 더 하고 받아야겠지만.. 막상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와서 마늘 가는 걸 잊지 말라든지.. 이런 내용의 전화를 받다 보면 언제든 전화를 받을 수 있는 내가 문제다.. 싶어 진다.


아침마다 찍어 바르고, 차려 입고 일하러 나갈 때, 어느 누구도 나에게 전화로 집안일을 부탁하거나 잔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다. 대단한 일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안 그래도 바깥 일로 바쁠 텐데 굳이 신경 쓰지 말라는 배려.

그건 나도 그렇다.

남편에게나, 형제들에게나. 시간을 다투는 일이 아니고선 웬만한 일로 전화나 메시지를 남기지 않으려 한다.

엄마는 이제 나에게 그런 배려를 딱히 할 필요가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계신 듯하다.


“엄마, 그런 건 나중에 만나서 말씀하셔도 되잖아요. 굳이 전화로..”

“왜? 바쁘냐?”

“아니, 바쁜 건 아닌데..”

“근데 왜? 전화 못 받을 이유가 있냐?”

“아니, 하루 종일 전화하셨잖아요. 그러니까..”

“너 일 안 하잖냐? 바깥 일로 바쁜 것도 아닌데 내 전화도 못 받냐? 귀찮다고? 귀찮아서 그러냐?”


하!! 삐치시면 답이 없다. 더 번지기 전에 수습해야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엄마가 메모해서 잊어버리지 않도록 기억하시는 게 엄마 정신건강에 좋으며, 그러니 어쩌고 저쩌고..

물론 이래 봐야 오늘 남은 하루 조용할 거고 내일 아침부터 여전히 벨은 또 울려댈 거다.


아.. 이번엔 영감님 전화다.

아버지는 외출하실 때마다 형제들에게 꼭 전화를 돌리신다.


“그래, 건강은?”

“어제 전화하셨는데요... 다행히 저도 밤새 안녕해요.”

“딸내미는? 잘 있고?”

“저.. 아버지. 어제 손녀도 어떻게 지내는지 다 말씀드렸는데요..”

“그래. 알았다. 운동은 꼭 해라.”


아버지의 통화 목표는 매우 명확하다.

밤새 안부를 ‘건강은?’이라고 물으셔서 그렇지 통화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안부다.

이런 ‘밤새 안녕?’류의 전화는 내가 일을 하고 있었을 때 전화 내용과는 많이 다르다.

아버지는 성격 상 내가 하는 일은 어떤지, 돈은 잘 벌고 있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전화를 마무리하셨었다.

이건 나뿐 아니라 오빠, 동생, 사위, 며느리 할 것 없이 모두에게 해당됐다.

그러나 큰 딸이 일을 하지 않자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관련된 질문은 자체 심의, 삭제하셨다.

내가 일을 더 이상 안 할 것 같은지, 더 이상 일을 하든 말든 관심이 없으신 건지, 뭐, 어쨌든 답하기 민망한 질문을 더 이상 안 해 주시니 감사!


이번 주엔 친정 동네 주민센터에 들러 분리수거 망을 받아와야 하고,

이모가 사시는 시골에서 받으신 보리쌀 값도 보내야 한다. 그리고 결국 유모차 식 보조보행기를 하나 사셔야겠다고 하시니 어떤 게 좋을지도 둘러봐야겠다.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도 가야 하고.


그때그때, 잠시도 일이 없는 날이 없다.

노인 두 내외 일이 뜸하다 싶으면 위아래 다른 식구들 잔 심부름 거리가 이때다 싶게 불쑥불쑥이다.

내가 하루 종일 일이라도 하고 있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게 말이다.

아마도 여태 못 한 혹은 얼마 못할 주변 돌보기를 이제라도 해 보라는 신의 계시인 모양이다.

어찌됐건, 내일은 내가 먼저 전화드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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