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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ntie J Jul 11. 2021

아마도, 시절이 사라지는 서운함

나의 최단 지름길


 대문을 열고 우회전, 5미터 이동 후 다시 우회전. 사람 2명이 겨우 다닐 수 있는 골목길이 시작된다.

주변은 지저분하고 정체불명의 쓰레기들이 간혹 널 부러져 있어 집을 나서자 곧 기분을 망치기 일쑤다.

하지만 이 길을 선택한다.

이유는 독서실로 가는 최단 지름길이자 친구인 N의 집을 경유해 함께 독서실로 갈 수 있기 때문.


10여 미터 지나면 살짝 숨통이 트이는 약 4명도 지날만한, 이 동네 골목길에선 그나마 중자 정도 되는 길이

툭하고 나온다. 이번엔 20여 미터 직진. 마지막 지름길로 접어들기 위해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난이도 최상. 딱 한 명만 지나갈 수 있는 길이다. 정확히 길이 아니라 건물과 건물 사이의 틈,

틈 치고는 폭이 넓어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길로 보이는 ‘틈’ 정도가 맞다.

이곳은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통과해야 한다. 모든 틈이 그렇듯 혼자 조용히 일을 해결하기에 딱 맞춤한

곳이므로 동네에서 한번쯤 봤을 법한 개들이 자주 들러 흔적을 남기고 간다.

E는 나름 이 부분에선 촉이 뛰어나 늘 찝찝한 장애물이 출몰하는 곳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혹 밟지 않고 본 것만으로도 밟은 것 같은 기분이 될 수 있으므로 확인 즉시 잽싸게 눈을 돌리고

부근에선 숨도 쉬지 않고 통과한다. 이제 몇 발자국 앞이면 N의 집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길이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인가? 물론 아니다.

빨라야 2분 정도요, 안전으로 말하자면 동네 뒷길에, 심지어 으슥한 틈을 지나야 하니 둘러가더라도

큰길로 다니는 게 여러모로 합리적이었다. 그럼에도 E가 3년 내내 이 길을 고집한 이유는 N의 집에 들러야

한다는 나름의 원칙 때문이었다. 아침 일찍 함께 등교하고 오후나 저녁엔 함께 독서실을 가기 위해서였다.     


N은 E의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쭉 친구. 다른 듯 비슷한 두 사람은 멍청한 시대가 두 사람을 몰라보는 바람에 평범한 인간계 고등학교에서 생고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즉, 두 사람 모두 학생의 본분인 공부에 탁월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N과 E는 시대가 몰라본 인물들은 모름지기 지난하고 고생스러운 시절을 보냈던 바, 두 사람 모두 그때가 그런 시기려니 하며 반드시 참고 이겨내 언젠가 찬란하게 부활하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

다짐했다. 그러나 어떻게 부활해야 할지는 몰랐다. 그래서 3년째 매달 독서실 이용권을 끊어 가장 구석진

자리를 차지하고 머리를 싸매고 졸며 분투하고 있었다. 물론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독서실 앞

슈퍼 의자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물고 수다를 떨거나, N의 집 어딘가에 쳐 박혀 대체 왜 우리 두 사람의 인생이 풀리지 않는지 넋두리를 하거나, 서로 좋아하던 가수의 노래며 팝송을 듣느라 정신을 팔았던 게 사실이긴 하다. 그러니 E는 절대 큰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학교와 독서실을 오가며 3년이라는 시간을 보냈지만 두 사람은 그저 그런 결과로 거기서 거기인 대학에 진학했다. 그때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며 찬란하게 부활하기에 우리 둘이 무거운 건 사실이라며

즉석떡볶이를 먹으며 다음 부활을 다짐했다. 역시 잘못 타고난 시대 탓도 곁들여 주면서.  


두 집 모두 이사를 했고 종종 안부 묻기에 누군가 게을러지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세월은 지나갔다.

더 이상 지름길로 N의 집에 들러 학교를 갈 일도, 독서실에 갈 일도 없어진 E는 더 이상 평범할 수 없을 만큼

무난하게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해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다.

N은 졸업 후, 큰 꿈을 품고 태평양을 건너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역시 그 동네에서 E만큼 평범하게 일을 하고 결혼도 해 두 딸을 키우며 살고 있다.         


E는 올해 벼르고 벼르다 N과 같이 살던 동네 골목길을 찾아 나섰다.

익숙했던 그 골목길을 찾아가 좁은 틈을 통해 N의 집도 보고 독서실도 들러 뭐라도 보고 와야 살 것 같았다.

부근을 찾아 적당한 곳에 주차한 뒤 독서실이 있던 건물부터 찾아봤다.

혹시라도 했지만 역시 독서실 건물은 예전보다 훨씬 더 크고 높은 건물로 바뀌어 있었고 독서실은 보이질

않았다. 남아있는 큰길을 따라 예전 집을 더듬어 찾아본다. 주인이 몇 번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이미

그 집은 오래전 사라진 것 같다. 그 자리엔 생뚱맞은 다가구 주택이 들어서 있었다. 다시 예전처럼 시작해본다. 대문을 열고 우회전, 5미터 이동 후 다시 우회전. 사람 2명이 겨우 다닐 수 있던 그 골목길! 남아 있다.

갑자기 왈칵 눈물이 차오른다. 모두 사라졌는데 골목길이 남아있다니! 이미 사라진 기대를 다시 모아 독서실로 가는 최단 지름길 까지 걷는다. 그러나 이미 그 길 주변은 E의 예전 집처럼 다가구 주택들이 잔뜩 들어서 아예 틈이 없어졌다. 길이 사라지니 동네를 알아볼 재간이 없다. 애써 짐작해 둘러 걸어 N의 집 부근을 찾아본다.

그러나 부근이라 짐작할 뿐 다가구 주택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어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가 없다.

맥이 풀린다.     


다행히 세상이 좋아 전화세 걱정 없이 바다 건너 친구와 얼굴까지 보며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다.

E는 옛 동네를 열심히 핸드폰에 담았다. 등교 때 버스를 타러 가던 길, E의 집에서 N의 집까지 가는 골목길.

그리고 독서실 부근까지. 찍고 또 찍었다.

더 이상 알아볼 수 없는 길이라 ‘아마도’라는 설명이 자주 곁들여졌다.


N은 동영상을 보고 펑펑 울었단다. 그 소리에 E도 덩달아 목이 메어 머뭇거리니 이번엔 둘이 같이 엉엉 울었다.그리고 두 사람은 사람들이 뭐든지 바꾸려고만 하고 간직할 줄 모른다며 누구에겐 지 모르겠지만 한참을

나무랐다. 그러다 문득, 나도 너도 모두 이렇게 많이 늙고 달라졌는데

집이 뭐고 길이 뭐라고 안 변했을까, 당연한데 왜 이렇게 서운할까 싶어 졌다.

아마도 시절이 사라지는 서운함. 지켜주지 못한 아쉬움. 때문일 거다.


세상이 알아봐주지 못한 인재 둘은 다음엔 꼭 둘이 같이 최단 지름길을 찾아가기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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