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er the sea 2
“그게 뭔데요?”
“공존.”
“말도 안 돼. 악의 축인 인간과 공존이라뇨?”
“인간은 자신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할 수밖에 없어. 그들 입장에선 그들이 맞고 우리가 틀린 거야. 하지만 역지사지할 줄 아는 인간도 존재한단다. 우리 편을 드는 인간도 있단 얘기야. 우리 역시 그들 편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해. 인간이 우리와 다르다고 해서 틀린 건 아니니까.”
“끄응.”
“모비딕에서도 에이허브 선장 같은 사람도 있는가 하면 이스마엘 같은 사람도 있잖니.”
“하지만 대부분 인간들은 에이허브 선장 같겠죠?”
“아마도 그렇겠지...”
“역시 인간에게 기대 같은 건 하면 안 되겠어요.”
“하지만 다수라고 해서 그게 항상 옳은 걸 가리키기만 하진 않는단 걸 인간도 알 거야.”
흰 수염고래는 말을 더 하려다 말고 멈추었다. 초음파를 통해 아내의 소리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흰 수염고래가 진동을 느끼고 있단 것을 알아차린 피피크랩은 몸의 방향을 돌렸다.
“호출 왔죠? 전 이만 가볼게요.”
“미안하다. 아내가 수유할 시간이라고 도움을 요청하는구나. 어군음향탐지기 소리 때문에 중간에 끊기긴 했지만.”
“휴, 이놈의 해양소음...”
피피크랩은 꿍얼거리면서 게걸음으로 [고래의 꿈]을 향해 다가갔다. 말미잘을 잠시 내려놓은 그는 열 개의 다리를 이용해 후기를 적어나갔다.
-마음의 양식을 한껏 섭취한 덕에 배가 터질 것 같은 ‘모비딕’이었습니다. 역시 흰 수염고래님과 함께 이야기 나누니 더욱 풍성해진 느낌이에요. 제가 에이허브 선장이었다면 과연 고래를 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살살 구슬릴 수 있었을지... 역지사지란 이렇게 어렵네요.
저장버튼을 누른 피피크랩은 흰 수염고래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떴다. 옆으로 한참을 기어가고 있는데 눈동자가 흐리멍덩한 크릴새우 하나가 위아래로 흔들거렸다. 흥. 이까짓 것에 내 속을 줄 알고. 무시하고 가려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낯선 크랩 하나가 입을 쫙 벌리며 다가왔다.
“안 돼!”
피피크랩은 납작한 몸통에 온 힘을 실어 상대를 밀어냈다. 두 크랩이 동시에 데칼코마니 형태로 넘어졌다.
“앗, 내 말미잘!”
“사랑의 증표!”
각자 말미잘을 줍느라 바닥을 헤매던 크랩들은 동시에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폼폼?”
“피피?”
두 크랩은 서로의 집게발을 엇갈리게 포갠 뒤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같은 말미잘로부터 떼어낸 증표까지 확인한 이들은 다시금 부둥켜안았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독서모임하고 돌아가던 길이었어.”
“뭐라고?”
“너 없는 사이 이 해역도 제법 문명화됐어.”
피피크랩은 폼폼크랩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실감 나게 들려주었다.
“진짜야? 우리가 인간의 휴대기기를 한 대씩 소지하고 있는 건 물론이거니와 모든 생물들이 한글을 깨쳤다고...?”
폼폼크랩은 믿을 수 없단 듯 되물었다.
“휴대기기의 주인이 누구였냐에 따라 안에 든 내용물의 성격도 천차만별이야. 어떤 휴대기기는 개 사진만 잔뜩 있길래 처음엔 개가 주인인 줄 알았다니까.”
“하하. 어떤 취향의 인간이었는지 짐작하는 재미가 쏠쏠하네.”
“자연 풍경이나 꽃 사진만 잔뜩 찍은 인간도 있고, 짝짓기 하는 모습만 찍어놓은 인간도 있더라구. 또 어떤 인간은 글자만 잔뜩 찍어놨어.”
“그래서 네 기기엔 무슨 사진이 많은데?”
“그보다도 앞으로 독서모임에 나오는 게 어때? 다음 도서는 ‘피노키오’야.”
“독서라니. 생각만 해도 머리 아파.”
“역시 온다고 할 줄 알았어.”
제멋대로인 건 여전하구먼. 폼폼크랩은 그런 피피크랩의 변하지 않은 모습이 차라리 반가웠다. 두 크랩은 이때까지 쌓인 회포를 신나게 풀었다. 정신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물풀 끝에 달린 별 모양의 생물을 아무도 인지하지 못한 채 지나쳤다.
“뭐야, 암컷이 아니잖아?”
폼폼크랩과 함께 탈출한 불가사리가 모래밭에 착지하며 중얼거렸다. 모래 몇 알이 공중으로 부유하며 치솟자 그 틈을 타 불가사리는 다시 깊숙한 곳으로 모습을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