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er the sea 3
[난파선]
태양 빛을 한 몸에 받은 바다는 해류의 리듬에 맞춰 고르게 넘실거렸다. 파장이 짧은 청색광은 수심이 깊어질수록 더욱 짙어졌다. 바닥까지 내려가면 심연의 색이 오묘한 푸른빛을 띨 것 같지만 의외로 그곳은 우중충한 시멘트더미를 뒤집어쓴 것처럼 볼품이 없었다. 개중엔 색색의 산호와 말미잘과 수초가 잔뜩 뒤덮인 스팟이 있기도 했다. 산호는 만발하게 피어있는 꽃무더기를, 돌기를 세우며 퍼져있는 말미잘은 버섯을, 싱싱한 초록을 내뿜으며 웃자라 있는 수초는 잡초를 연상시켰다. 그것만 보면 여기가 꽃밭인지 해저인지 헷갈렸다.
오늘도 잠수복과 고글로 무장한 인간 하나가 수중촬영을 하고 있었다. 다이버는 휴대기기에서 잠시 눈을 떼곤 길 잃은 이방인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산호초를 찍는데 집중하다 보니 생각보다 너무 멀리 온 탓이었다. 하지만 치어 떼의 꽁무니에서 만들어지는 물보라에 매료되어 곧 동공이 풀렸다. 치어 떼를 따라가던 그의 시선이 어느 곳에서 멈추었다. 다이버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참으로 거대한 물체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에 난파선이 있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아마도 아주 오래전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당시 배가 침몰된 게 아닐까 추측할 따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낡아서 부패된 선체엔 온갖 수초들이 휘감고 있어 본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멀리서 보면 털 달린 수중가옥 같기도 했다. 다이버는 난파선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창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뚫린 틈 사이로 치어 떼들이 자유로이 넘나들었다. 그는 휴대기기로 난파선의 모습을 담았다. 내부에 들어서자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어두운 심연이 흘러넘쳤다. 천장에는 온갖 따개비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마치 질서 정연한 해양생태도감을 보는 것 같았다.
[쉭쉭-]
난파선에서 나는 소리였다. 소리가 날 때마다 갑판이 미세하게 좌우로 흔들렸다. 다이버는 소리의 출처를 찾기 위해 더욱 아래로 내려갔다.
-으아악.
지구상에서 가장 긴 두족류라고 불리는 대왕오징어가 선체 바닥에 누워 있었다. 다리를 몸통 쪽으로 최대한 접어 올렸음에도 2미터는 족히 넘어 보였다. 꼼짝도 않고 있는 이 생물체가 죽은 건지 자는 건지 모르겠지만 달아나는 게 상책이었다. 다이버가 수면 위로 몸통의 방향을 돌리는 순간 대왕오징어의 농구공만 한 눈이 번쩍, 하고 뜨였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물 중 가장 큰 눈과 정면으로 마주친 다이버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황급히 도망쳤다. 혼비백산하는 바람에 휴대기기가 떨어졌지만 그런 미비한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얏!”
빛과 소음에 민감한 대왕오징어는 자신의 밀실에 침입한 인간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거기다 이마 한가운데에 타격까지 가하지 않았는가. 몸을 일으킨 대왕오징어는 여덟 개의 다리를 아래로 내린 뒤 눈 근처에 있는 수관에서 엄청난 양의 물을 쏟아냈다. 그러자 추진력을 받은 몸이 로켓처럼 솟아올랐다. 주황색과 흰색이 얼룩덜룩 섞여있는 대왕오징어의 몸이 일직선으로 쭉 뻗어 오르자 크기와 속도에 압도된 주변의 잔챙이들이 선회하여 달아났다.
“간만에 인간 고기나 먹어볼까.”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이미 먹잇감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잠수복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두툼한 지방이 눈앞에 아른거렸으나 그는 더 이상 힘을 쓰고 싶진 않았다. 사실 이러한 사냥방식은 대왕오징어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그는 대개 바닥에 매복해 있다가 긴 다리를 뻗어 먹이를 잡곤 했다. 난파선으로 돌아온 대왕오징어는 긴 촉완을 이용해 인간이 던졌던 물건을 들어 올렸다.
“오호, 최신형이잖아! 좋아. 이 정도면 봐줄 수 있지.”
그렇지 않아도 가지고 있던 구형 휴대기기가 잔고장이 많았던지라 그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오징어님, 안녕하세요.”
창틀 사이로 시커멓고 기다란 생물이 쑤욱 튀어나왔다. 가장자리에 있는 노란 등지느러미를 제외하곤 모두 검정색인, 아직 암수구별도 안 되는 새끼 장어였다. 오십 센티가 넘는 데다 한 시도 쉬지 않고 몸을 구불거렸기 때문에 대왕오징어는 보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졌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함을 가장했다.
“리본장어로구나.”
“오징어님, 이마 한쪽이 부었네요. 다치셨어요?”
“인간이 물건을 던졌거든.”
“역시 인간은 나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