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er the sea 1
[갯바위구 물풀동 파래 25번지]
밀물과 썰물의 흐름이 빠른 갯바위구는 바다 생물들이 가장 선호하는 서식처였다. 암초가 제멋대로 뿌려져 있는 듯한 들쑥날쑥한 지형이었기에 감성돔, 볼락, 우럭 같은 물살이뿐 아니라 조개, 멍게, 굴 등이 떼 지어 살았다. 이 냄새를 기막히게 맡은 몇 호모사피엔스들은 곧바로 낚시터란 걸 만들어 수입을 올렸다. 낚시터가 유명해지는 속도에 비례해 그곳에서 분실하는 휴대기기의 수도 함께 늘어났다. 갯바위구는 워낙에 험준한 수중구조를 띠고 있었기에 무언가를 바다에 빠뜨리면 줍는 것을 단념해야 했다.
바다생물들은 휴대기기가 최초로 떨어졌던 날을 잊지 못했다. 미끼에 걸려 돌아오지 못한 동족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사진첩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동족들을 칼로 난도질하는가 하면 끓는 물에 잡아넣는 등 인간의 잔악무도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사진첩 속 야만인들은 친구와 부모와 이웃이었던 이들을 하나같이 살벌하게 먹어대고 있었다. 모든 휴대기기엔 동족의 죽음이 증거로 남아 있었다. 한동안 바다생물들은 메스꺼움과 소화불량을 호소했다. 심한 이들은 PTSD 같은 정신질환에 시달리기도 했다. 누군가는 휴대기기를 저주하며 패대기치는가 하면 다시 뭍으로 던져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잊을만하면 다른 휴대기기가 입수되었다. 어느 순간 바다생물들은 휴대기기를 증오하는 대신 그것을 사용하게 되었다. 카메라를 터치하여 자신의 모습을 찍거나, 달력을 터치하여 살아온 날들을 어림잡아보거나, 계산기를 터치하여 조에 이르는 숫자 단위를 세어보는 재미에 맛이 들려버렸다. 종내에는 이 해역에 사는 모든 바다생물들이 휴대기기를 소지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휴대기기가 며칠 지나지 않아 꺼져버린다는 것이었다. 전기가오리가 나서서 다양한 방식으로 충전을 시도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투명 주머니 안에 든 휴대기기가 입수되었다. 바닷물에 접촉되지 않은 기기는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또 하나 이전 기기와 다른 점은 바다생물의 지느러미와 직접적으로 닿지 않아도 터치가 먹힌다는 것이었다. 전기가오리의 충전이 먹힌 것 역시 두 말할 나위 없는 쾌거였다. 바다생물들은 이날 이후 투명 주머니에 든 휴대기기만을 상대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휴대기기의 몸체에 꼭 맞게 투명막이 씌워져 있는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것의 터치감은 훨씬 좋았다.
갯바위구의 물풀더미를 한참 지나 수심 깊은 곳까지 다다르면 군무를 추는 스물다섯 개의 파래를 만날 수 있었다. 그곳이 바로 흰 수염고래의 은신처였다. 청색과 회색이 적절히 섞인 흰 수염고래는 지구 역사상 가장 거대한 동물로 불렸다. 그러나 200톤 가까이 나가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크릴새우처럼 좁쌀 같은 생물들을 잡아먹었다. 그래서인지 이빨고래와는 달리 순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흰 수염고래는 하루에 4톤 정도의 먹이를 섭취해야 했기에 밀도 높은 플랑크톤 무리를 발견하면 입을 크게 벌리고서 바닷물과 함께 와악- 하고 섭취했다. 흰 수염고래의 입천장에 달린 수염은 인간이 자동차를 세척하기 위해 만든 세차장 브러시를 연상시켰다. 털이라기보다 촘촘한 빗에 가까운 그것을 통과하면 입속에서 먹이가 절로 걸러졌다.
그는 휴대기기를 공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생물이었다. 갯바위구 물풀동 파래 25번지에서 네모난 빛을 밝히고 있는 [고래의 꿈]은 그의 표식이나 다름없었다. 투명 막에 든 고물패드는 바위틈에 정교하게 끼워져 있었기에 어떤 세찬 물결이 밀려와도 움직이지 않았다. [고래의 꿈] 안에는 인간이 결제한 수백 권의 책들이 들어 있었다. 그는 많은 생물들이 [고래의 꿈]이라는 공공재를 자유로이 쓰길- 책을 읽고 노트 어플에 기록을 남겨서 자신의 생각을 정립하길- 바랐다. 그러나 대개의 바다 생물들은 독서에 관심이 없었다. 오늘 열린 독서모임에도 참석한 생물이라곤 고작 한 마리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흰 수염고래는 자신의 가치를 고수했다. 그가 노트 어플을 터치하자 ‘모비딕’이란 제목이 상단에 떴다.
“글밥이 많아서 읽긴 힘들었지만 오기가 생겨서 끝까지 봤어요.”
“중도하차할 줄 알았더니 대단하구나.”
두 집게발에 말미잘을 꼭 쥔 피피크랩은 [고래의 꿈]이 생기기 전부터 흰 수염고래의 은신처에 종종 놀러 왔었다. 이야기하길 좋아하는 피피크랩은 흰 수염고래와 쿵짝이 잘 맞았다. 두 생물이 함께 있는 모습을 인간이 보았다면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인 줄 알고 손에 땀을 쥐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모비딕에 나오는 향유고래는 이빨고래 과인가요?”
“그렇지. 나의 친척뻘인 이빨고래는 사냥할 때 200개가 넘는 이빨을 쓴단다. 그게 수염을 쓰는 나와 가장 큰 차이점이지.”
흰 수염고래가 입을 벌리고 싱긋 웃자 입천장에 달려있는 수염들이 밖으로 살짝 노출되면서 나풀거렸다.
“흰 수염고래님, 저는 읽는 동안 너무 열이 받았어요. 에이허브 선장은 고래 때문에 한쪽 다리를 잃었단 이유만으로 복수심에 불타올라 모비딕을 뒤쫓잖아요. 고래 뼈로 의족을 하고 있는 주제에 감사한지도 모르고 말이에요.”
“으음. 나는 인간이 참으로 감정적인 동물이란 걸 다시금 깨달았단다.”
“그렇게 감정적이니까 모비딕에게 던진 작살 밧줄이 자기 목에 감겼던 거겠죠. 어리석은 선장 같으니라곤...”
피피크랩은 말미잘을 흔들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런데 인간이 쓴 책은 왜 죄다 우릴 죽이려는 내용이죠?”
흰 수염고래는 가볍게 웃음을 띠었다.
“하지만 포경을 금지시키는 법안을 만든 것도 인간이란다.”
“쳇. 그건 고래 기름을 대체할 수 있는 석유를 발견했기 때문 아닌가요? 또 지금도 불법으로 고래잡이를...”
“피피, 그래서 우리도 인간사냥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니?”
“흰 수염고래님은 마냥 참는 게 능사라고 생각하세요?”
“상대가 싫다고 해서 죽이려 들면 우리도 화를 입게 돼. 결국 모두 자멸할 뿐이지.”
“상대를 죽이고 우리는 살아남으면 되잖아요?”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