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er the sea 4
“너도 인간을 싫어하니? 성숙기에 도달한 네 몸이 아름답다며 ‘리본 장어’라는 멋진 이름까지 지어줬는데도?”
“흥. 누가 지어 달랬나? 오징어님은 인간이 왜 싫어요?”
“날더러 크라켄이라는 ‘무서운 바다 괴물’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는데 좋아할 수가 있나? 괴물은 지들이면서.”
“흐흐. 그건 맞아요. 인간이야말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최고의 악이죠. 으앗, 웃으니까 배가 더 아프네.”
“배가? 개복치 의원한테 가봤어?”
리본장어는 몸통을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배탈이래요. 약도 처방받아 먹었는데 안 낫네요.”
“혹시 이상한 걸 먹었나?”
리본장어는 어떻게 알았냔 듯 지느러미를 퍼덕거렸다.
“대왕문어님이 사라진 이후 바다가 무질서해져서 이 모양이 된 거예요. 구획을 정해놓고 먹이사냥하던 규칙을 아무도 안 지키잖아요. 어떤 놈이 계속 내 구역을 침범하길래 나도 다른 데 가서 먹이사냥을 했더니 이 꼴이...”
대왕오징어는 왕좌가 공석이 된 지 꽤 되었단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사실 이 해역에선 크고 작은 싸움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대왕오징어의 삶은 별반 달라진 게 없었으니 아무도 시비를 걸어오지 않아서였다.
리본 장어는 계속 복통을 호소하며 몸을 이리저리 뒤집었다. 기나긴 꼬리로 배를 문지르려고도 해 봤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자꾸만 꼬여 잘 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대왕오징어는 자신의 열 개 다리를 이용해 리본장어의 배를 문질문질 해주었다.
“우왕, 고마워요. 한결 괜찮아진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난파선은 오징어님의 집인가요?”
대왕오징어는 세모꼴의 지느러미를 흐느적거리며 난파선 내부를 한 바퀴 휘익 돌았다.
“그건 아니고 낮잠 잘 때 종종 이용한단다. 심해처럼 어두워서 딱이거든. 그러고 보니 아까 꾼 꿈이 생각나네. 꿈에서 용인지 미꾸라진지...”
“엇, 혹시 용왕님?”
“흠. 그게 그러니까 길쭉하고 굵긴 한데 용왕인지는 정확히...”
“대박! 용왕님 꿈은 아무나 꾸는 게 아니라고 하던데.”
‘얘 뭐야? 신화 속 생물을 진짜 믿는 거야?’
대왕오징어는 커다란 눈알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리본장어를 보았다.
“오징어님. 우리 소원 빌어요.”
“뭐?”
소원 비는 걸 해본 적이 없는 대왕오징어는 리본 장어의 성화에 못 이겨 열 개의 다리를 엉거주춤 중앙으로 모았다. 그 바람에 다리 사이에 감춰져 있는 입이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리본 장어는 양쪽의 노랑 지느러미를 한껏 모으곤 늘 하던 대로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용왕님께 비나이다. 오징어님과 저의 아픈 곳이 낫게 해 주시고, 우리를 낚싯대로부터 지켜주시고, 해양쓰레기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미세 플라스틱으로부터 구제해 주시고... 마지막으로 이 해역의 안녕을 비나이다.”
“너 소원 좀 빌어본 솜씨다?”
눈을 뜬 대왕오징어는 리본장어가 아까와 달리 보였다.
“우리 리본장어들은 용왕님을 믿거든요.”
‘흥. 길쭉하게 생겼다고 해서 지가 용왕 후손이라도 되는 줄 아나?’
대왕오징어는 속마음과 달리 자상하게 웃어 보였다. 리본 장어가 용왕님 꿈을 꾼 자신더러 선택받은 생물일지도 모른다며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추켜세워 주어서였다.
“오징어님. 그럼 다음에 또 봐요. 그때도 용왕님 꿈꾸거든 저한테 들려주세요.”
꿈이 마음대로 꿔지냐? 그러나 대왕오징어는 아무 말하지 않고 열 개의 다리로 새끼 리본장어를 배웅했다. 현란한 굴곡을 만들어내며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대왕오징어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저 시커먼 보호색을 보면 어린놈이지만 아무도 선뜻 건드릴 생각을 못할 것 같다니까. 그래서 저렇게 맹랑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