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er the sea 6
[용왕님 가라사대]
“자연의 색이 어쩜 저리 곱고도 신비로울까?”
바다생물들은 리본장어가 지나갈 때마다 힐끔거렸다. 사춘기에 이른 리본장어는 이제 까만색이 아닌 사파이어 같은 청옥색으로 몸통이 뒤덮여 있었다. 그것은 노랑 지느러미와 어우러져 눈부신 조화를 이루었다.
“나도 너처럼 고운 시절이 있었지. 지금을 즐기렴.”
기다란 몸통에 싯누런 색을 한 리본장어가 저편에서 말을 걸어왔다.
“누님이라고 해야 하나요. 여하튼 안녕하세요.”
“아유, 예의 바른 수컷이기도 하지.”
“아직 겪어보진 않았지만 암컷의 고충이 이해가 가네요. 부디 산란 잘하셔요.”
리본장어는 끝인사도 깎듯이 하고선 난파선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오징어님.”
“이야! 너 때깔 한 번 죽이는구나.”
리본장어는 이전보다 몸집이 더 커졌지만 비늘을 덮은 색깔이 아름다웠기에 미성숙기보다 더 만만해 보였다.
“이제부터가 인생의 절정기 아니겠어요? 암컷 되기 전까지 실컷 놀 거예요. 참, 오징어님.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배가 하나도 안 아파요. 오징어님의 문질력 덕인가 봐요.”
“문질...력? 하하.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구나.”
그때 난파선 창틀 사이로 은빛연어 한 마리가 힘차게 물살을 헤치며 들어왔다.
“여기가 용왕님을 꿈에서 보았다는 오징어님이 사는 곳 맞나요?”
“제가 그 오징어입니다만.”
대왕오징어는 최대한 음성을 낮게 내리깔았다.
“제 동료가 사냥한 먹이를 빼앗겨서 울고 있었는데 도와주셨다면서요. 감사해요.”
“난 그저 대왕문어님이 정해놓은 사냥 구역을 모리배들에게 환기시켜 준 것뿐인데.”
은빛연어는 겸손하기까지 한 대왕오징어에게 지느러미를 모아 예를 표했다.
“오징어님이 꿈 이야기를 늘어놓자 그놈들이 아가미 찢어지도록 줄행랑쳤다면서요. 참으로 대단하세요.”
대왕오징어는 용왕이란 신화 속 생물의 위력을 새삼 실감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뒷골목의 껄렁뱅이들에게 겁주던 평소의 행위를 가지고 다들 찬양일색으로 추켜세워 줄 리 없었다.
“저기... 무리한 부탁인 줄은 알지만 아예 공식적으로 나서서 바다의 무질서를 바로 잡아주시면 안 될까요? 대왕문어님이 오기 전까지라도 말이에요.”
은빛연어는 난파선에 온 목적을 가감 없이 쏟아냈다. 얼마 뒤 산란을 위해 민물로 돌아가야 하는데 지금처럼 무법천지의 바다가 계속된다면 강에 도달하기도 전에 이곳에서 운명을 다하고 말 것이었다. 삶의 목적이 유전자를 남기는 게 전부인 은빛연어에게 바다에서 목숨을 보전해야 하는 일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하지만 대왕문어님의 왕좌에 어찌 내가...”
대왕오징어가 말끝을 흐리자 리본장어가 바로 그 말을 받아 챘다.
“사실 몸집 크기로 말할 것 같으면 문어, 오징어, 고래 세 분이 비등하잖아요. 인간이 이 세 분에게만 ‘대왕’을 붙여준 것만 봐도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픈 말은 원래 오징어님도 대왕오징어라 불릴 자격이 있단 거지요.”
옛날 옛적 대왕문어가 왕좌를 차지하게 되면서 ‘대왕’이란 단어는 오직 문어에게만 붙일 수 있도록 합의를 본 적이 있었다. 그 이후 대왕오징어에겐 그냥 오징어, 대왕고래에겐 흰 수염고래라고 부르게 된 것이었다.
‘하긴, 언제까지 왕좌를 공석으로 둘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고 어젯밤에 진짜로 용왕 꿈을 또 꾸기도 했고. 정말 내가 선택받은 생물인 걸까?’
용왕이란 존재에 대해 생각하다 잠이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또다시 꿈에 용왕이 등장한 것이었다. 사실 대왕오징어는 자신이 꿈에서 본 게 용왕이라고 단정 짓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신화 속 생물을 실제로 본 이가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용왕의 모습은 저마다 각양각색일 것이었다.
신화에 의하면 용왕님의 몸을 덮고 있는 비늘은 너무도 투명하여 보이지 않을 정도이며 몸의 길이 역시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라 했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어딘가에는 존재하는, 그리하여 이 해역을 지켜주는 범접 불가능한 생물이 바로 용왕님이었다.
‘용왕이 진짜 존재한다면 난 선택받은 거고, 신화일 뿐이라 해도 내 꿈에 나왔단 사실은 변치 않는다. 꿈이 몽환적이었던 것으로 추측컨대 분명 용왕 비스... 아니, 용왕이었어. 그래, 까짓 거 대왕문어가 한 것처럼 이 해역을 통치해 보자. 대왕이 별 건가? 나도 원래 대왕오징어였잖아.’
기다란 촉완에 힘이 바짝 들어간 오징어는 결심한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