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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예나 Nov 08. 2024

오션토피아

Under the sea 5

[고래의 꿈]     

 수면 위로 올라간 흰 수염고래는 후욱- 하고 숨을 내쉬었다. 폐에 있던 공기를 분사하자 두 개의 콧구멍 같은 분기공에서 물보라가 분사되며 하늘높이 치솟았다. 장대 같은 자연분수가 허공에서 춤을 추자 때마침 지나가던 고래바다유람선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비스듬히 걸린 무지개를 휴대기기로 찍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흰 수염고래는 한껏 포즈를 취한 뒤 다시 바다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렇게 갯바위구를 향해 천천히 유영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낯익은 생물 하나가 지느러미 같은 팔을 휘휘 내저으며 아는 체를 해왔다.

 “아이고, 흰 수염고래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아니, 이게 누군가.”

 바다거북은 아쿠아리움에 감금되었던 그간의 사정과 더불어 탈출해서 오기까지의 과정을 흰 수염고래에게 상세히 털어놓았다. 대왕문어와의 조우는 이야기의 백미였다. 물론 대왕이 인간 세계에서 박수갈채에 둘러싸여 이상한 재주를 부리고 있더란 얘긴 하지 않았다.

 “대왕문어님까지 돌아오신다니 참으로 겹경사로군! 것 참 잘 되었어. 그간 대왕문어님이 말씀도 없이 어딜 떠나셨나 했거든.” 

 장기간 실종이면 십중팔구 인간의 짓임을 모를 리 없는 흰 수염고래지만 상상조차 하기 싫어 그간 외면해 왔던 터였다. 바다거북은 흰 수염고래의 허리쯤에 밀착하여 함께 나아가는 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해역도 많이 바뀌었군요.”

 “인간들이 낚시터를 세운 바람에 미끼들이 범람하고 있다네. 조심, 또 조심하게.”

 갈고리에 걸린 냉동새우를 곁눈질로 살피던 바다거북은 저도 모르게 모가지를 등딱지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런데 이건 뭐지요?”

 갯바위구 물풀동 파래 25번지의 표식마냥 네모난 빛을 밝히고 있는 패드를 발견한 바다거북은 다시 모가질 내밀었다.

 “[고래의 꿈]이라는 공공재라네. 과거 인간들은 대부분 문맹이었다고 하더군. 읽고 쓸 줄 아는 건 소수의 특권계층이었기에 가진 자의 시선에서 모든 기록이 남겨졌던 거지. 한 마디로 다수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했어. 하지만 이 해역은 달라. 모든 생물들이 읽고 쓸 수 있으니까. 낚시터가 생겨서 나쁜 점도 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휴대기기가 입수되니 한글을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게 되었지. 그물에 낚인 물살이들이 구사일생으로 돌아와 말소리를 가르쳐준 것도 꽤 도움이 되었고 말일세. 자네도 뭍에 있다 와서 그런지 말이 더 유창해진 것 같구먼.”

 “하하. 그런가요?”

 바다거북은 갑작스러운 칭찬에 멋쩍어하면서도 [고래의 꿈]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패드에서 가장 활성화된 기능은 메모장이었다. 독서 기록과 그 외의 기록이 카테고리 별로 나뉘어 저장되어 있었다.

 “마치 인간들이 쓰는 대자보 같군요.”

 “그게 뭔가?”

 “큰 종이에다 쓴 다음 벽에 붙여 여럿이서 보는 방식이지요. 과거보단 줄긴 했지만 여전히 인간들이 선호한다고 들었습니다.”

 바다거북은 야구모자의 트럭에 실려 이동했을 당시 차체에서 흘러나오던 ‘매체의 역사’를 기억나는 대로 말했다.

 “바다에 입성한 기념으로 한 줄 써도 되겠습니까?”

 “여부가 있겠는가.”

 흰 수염고래는 방명록 장을 열어주었다. 바다거북은 아직 익숙지 않은 터치로 느릿느릿 글자를 입력해 나갔다.

 -바다거북, 인간세계를 탈출하여 돌아오다. 아쿠아리움이란 곳에서 수개월간 감금당했으나 수확도 있었으니... 바로 대왕문어님을 만났단 것. 보름달이 뜰 때쯤 모습을 드러내실 예정이니 다들 대왕문어님의 컴백을 기대하시라!

 “개성 있는 문장이군. [고래의 꿈] 성격이 확장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시간이 되면 내가 운영하는 독서모임에도 나오지 그래. 이번 도서는 ‘피노키오’인데 얇아서 입문용으로도 그저 그만이라네.”

 “짬날 때마다 와서 읽어보고 참석하겠습니다.”

 이때 흑명태 하나가 지나가다 말고 지느러미를 과하게 파닥거렸다.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잖아. 길에다 이런 걸 세워놓으면 어쩌... 자는 걸까요?”

 흑명태는 바다거북 뒤에 거대한 배경처럼 버티고 있는 흰 수염고래를 보곤 뒤늦게 예의를 차렸다.

 “미안하군. 하지만 공공재의 위치를 옮길 수 없는 점 양해 바라네.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기 위해선 잘 보이는 길목에 있어야 하거든.”

 흑명태는 공공재란 말에 호기심이 생겨 [고래의 꿈]을 터치해 보았다. 인간이 저장해 놓은 수많은 책, 그리고 글을 저장해 놓은 메모장 말곤 별다른 게 없었다. 그때 자신을 사로잡는 문장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오, 대왕문어님의 컴백? 이거 진짭니까?”

 바다거북은 자신 있게 팔을 들었다.

 “그럼요. 뭍의 세계에 있을 때 저랑 약속했는걸요.”

 흑명태는 그 말을 믿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다소 마음이 놓였다. 요사이 바다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 때문에 먹이사냥은 물론 잠자리에 있어서도 피해가 막심한 탓이었다.

 “그런데 패드 안에 볼 만한 게 없네요.”

 흰 수염고래는 머리를 좌우로 저었다.

 “독서, 그리고 기록이란 게 처음엔 어렵고 진입장벽이 높은 행위로 여겨질 수 있지만 나중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을 수도 있을 거네. 그리 되면 생물들끼리 건전한 토론 문화가 형성될 것이고 우리는 보다 이상적인 생물로 거듭나게 되겠지.”

 “아까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해도 된다고 하셨는데 그럼 한 마디 써도 되겠습니까?”

 흰 수염고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흑명태는 빠르게 끄적여나갔다. 그가 꼬리를 흔들며 사라진 자리엔 이런 문장이 남아 있었다.

 -공공재 고래의 꿈 철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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