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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예나 Nov 15. 2024

오션토피아

Under the sea 7

 “앞으로 이 해역의 치안유지와 안녕질서를 위해 한 번 힘써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어젯밤 용왕님께서 제 꿈에 찾아온 이야길 들려 드리도록 하지요.”

 “우와, 역시 또 꿈에 강림하실 줄 알았어요!”

 리본장어는 노랑과 청옥색이 섞인 몸통을 비비 꼬면서 기뻐했다. 그와 달리 은빛연어는 ‘꿈보다 해몽인 건가’ 싶은 표정으로 대왕오징어와 리본장어를 번갈아 보았다. 

 ‘리본장어가 언제부터 저렇게 용왕님을 믿었던 거지? 아니, 그보다도 언제부터 저렇게 오징어님을 추종한 거지?’

 대왕문어의 통치 시절, 리본장어의 충성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었다. 그렇기에 은빛연어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간 알게 모르게 불만이 쌓여서 변한 걸까 싶기도 했다. 그때 난파선 안으로 시커먼 주둥이 하나가 쓱 들어왔다.

 “저기, 지나가다 본의 아니게 엿들었습니다. 요즘 해역이 안정을 되찾았다 싶었는데 그게 다 오징어님 덕분이었군요.”

 모두의 시선이 흑명태에게로 쏠렸다.

 “헌데 대왕문어님이 머지않아 돌아온단 소식은 들으셨는지요?”

 “누가 그래요?”

 리본장어가 흑명태를 불청객 대하듯 쏘아보았다. 흑명태가 방금 본 [고래의 꿈] 이야기를 늘어놓자 리본장어는 코웃음을 쳤다.

 “오징어님, 누군가 끼적인 낙서 따위에 신경 쓰지 마세요.”

 고개를 끄덕이려는 대왕오징어를 향해 은빛연어가 도리질을 해 보였다.

 “[고래의 꿈]은 흰 수염고래님이 만든 공공 커뮤니티 게시판이에요. 신빙성이 없지 않습니다.”

 은빛연어는 체력훈련을 위해 험난한 지형인 갯바위구까지 가서 비늘 도장을 찍고 오는 게 일상이었다. 그래서 [고래의 꿈]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때 리본장어가 또 한 번 나섰다.

 “아마 누군가 지어낸 글이겠죠. 글로 적어놨으니 그럴듯해 보이는 거 아니겠어요?”

 순간 흑명태는 대가리를 세게 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기록으로 보존해야 그럴듯해지는구나... 시간이 지나도 많은 이들이 볼 수 있고 말이지. 흰 수염고래는 누구보다도 이걸 빠르게 간파했던 거야.’

 흑명태의 주둥이에서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우리도 오징어님의 꿈을 기록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용왕님의 말씀을 박제하는 겁니다.”

 “우왓, 좋은 생각이에요!”

 리본장어가 흑명태의 말에 찬성하며 몸을 덩실거렸다. 대왕오징어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난파선 아래로 세모 지느러미를 밀어 넣었다. 수관에서 물이 후욱, 하고 뿜어져 나오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큼지막한 몸통이 무서운 속도로 내려갔다. 그와 같은 기세로 조금 뒤 다시 올라온 대왕오징어의 여덟 개 다리엔 [고래의 꿈]과 비슷한 크기의 휴대기기가 감겨 있었다. 생물들 모두 힘을 합쳐 빨판으로부터 패드를 떼어냈다. 투명 막 안에 든 패드는 약속이라도 한 듯 흑명태에게 건네졌다.

 ‘이왕이면 [고래의 꿈]을 능가하는 걸로 만들어야지.’

 메모장을 활성화시키는 흑명태의 마음 저변에서 인정욕구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사실 흑명태는 치어 시절부터 용왕님에 대한 이야길 아가미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다. 그에게 이야길 들려주었던- 지금은 노쇠한- 명태들은 아직도 신화 속 생물을 지극정성으로 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들이 명태 류를 워낙 싹쓸이해 간 탓에 절멸 위기에 놓이기도 했고 지구온난화로 인해 이 해역에서의 짝짓기가 점점 어려워진 탓이었다. 흑명태는 자신의 종끼리 암묵적으로 떠받들고 있는 용왕님 신화에 대해 다른 물살이들에게 언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특히나 대왕문어님 시절에는 모두가 그를 믿고 따랐기에 더욱이 입조심을 했었다. 그런데 오늘 용왕님을 따르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단 것을 알고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물살이들은 항상 의지할 누군가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 흑명태는 대왕문어가 바다에 돌아올 확률이 0에 수렴한다고 보았다. 바다거북이 육지에서 탈출한 것을 기적이라 봐야 할 것이었다. 현재로선 오징어님 아래 집결하는 게 이 해역의 안정을 도모하는 최선의 길이었다. 그는 용왕님을 봤다는 꿈 내용이 조금 의심스럽긴 했으나 다른 한편으론 얼마나 평소에 믿음이 신실했으면 꿈에 나오는 것일까 싶었다.  

 “[용왕님 가라사대] 어떻습니까?”

 “우와, 주둥이에 착착 감기는데요?”

 “참으로 비상한 재주를 가진 물살이로구먼.”

 대왕오징어가 스윽 다가와 흑명태의 측선을 촉완으로 스윽 쓰다듬었다. 그 바람에 흑명태의 배지느러미가 눈치 없이 팔딱거렸다. 칭찬에 날뛰는 흑명태를 대왕오징어는 짐짓 못 본 척하며 첫 글을 남겼다.

 -제 꿈에 홀연히 나타나신 용왕님 가라사대, 어지러운 해역을 이끌어 나갈 자는 오직 대왕이란 타이틀이 붙은 한 마리의 생물뿐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위로는 지느러미가 있고 중간엔 몸통이, 가장 아래엔 머리와 다리가 달려있다고 첨언해 주신 뒤 소리 없이 사라지셨고 저는 동시에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흑명태는 대왕오징어가 쓴 글자의 크기를 진하게 키우다 말고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이건 문어와 오징어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잖아. 앞으로 흥미진진하겠군.’

 흑명태는 모인 이들에게 한 마디씩 쓸 것을 권했다. 바로 리본장어가 나섰다.

 -용왕님, 제 꿈엔 언제 나오실 건가요? 알러뷰.

 다음은 흑명태가 썼다.

 -용왕님께서 연일 대왕오징어님의 무의식을 통해 말씀을 전달하고 계신다.

흑명태는 오징어 앞에 ‘대왕’을 붙일까 말까 살짝 고민하다가 결국 붙이는 쪽을 택했다. 아무래도 [용왕님 가라사대]에 기록으로 남겨지는 만큼 처음부터 드높여줘야 그럴듯해 보일 것 같았다.

 은빛연어도 우물쭈물하다 지느러미를 들었다.

 -신화가 현실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용왕님 가라사대]를 자축한 생물들은 덕담을 나누곤 각자의 거처로 돌아갔다. 대왕오징어는 낮잠을 청하기 위해 난파선 아래로 침전했다.

 한참 후 난파선 앞 모래밭에서 별모양 하나가 훅, 튀어 올랐다. 사방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불가사리는 네모나게 빛나는 패드 속 문장들을 주욱 읽어 내려갔다. 그리곤 다섯 개의 팔로 재빠르게 감상을 남겼다. 참으로 군더더기 없는 명료한 두 음절이 달렸다.

 -멍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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