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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예나 Nov 22. 2024

오션토피아

Under the sea 9

 

 “피피. 네가 저번에 인간계에서는 투표라는 걸 한다고 하지 않았어? 흰 수염고래님, 우리도 그 제도를 도입해서 찬성, 반대를 가려보는 건 어떨까요?”

 그러자 거북이 팔을 휘휘 저었다.

 “만약 그렇게 했다가 대왕문어님을 기다리잔 표보다 새로운 대왕님을 받들잔 표가 많이 나오면 어떡해요? 우리가 소수란 이유로 묵살되는 건 싫어요.”

 생물들의 의견이 갈리는 가운데 흰 수염고래의 묵직한 한 마디가 대화를 종결시켰다.

 “난파선에 가봐야겠구나.”

 거북이 길잡이로 앞장서자 흰 수염고래 뒤로 두 크랩도 따라나섰다. 사실 흰 수염고래는 대왕오징어를 만나러 가는 길이 영 탐탁지 않았다. 둘은 조상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웬만하면 부딪치는 것을 피해왔었다. 흰 수염고래의 친척뻘인 이빨고래가 대왕오징어와 격렬하게 싸운 끝에 잡아먹었단 이야기는 고래들 사이에서 전래동화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동화의 백미는 인간들이 고래사냥을 하여 이빨고래의 배를 갈랐는데 그 안에 든 대왕오징어의 사체를 보고 괴물이라 여겨 도망갔단 결말이었다. 그 때문에 오징어들은 속으로 고래를 적대시했다. 그건 고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난파선의 크기에 맞먹는 몸집을 가진 흰 수염고래가 안으로 들어오자 대왕오징어는 저도 모르게 다리가 경직되었다. 함께 있던 작은 물살이들도 일제히 숨을 멈췄다. 고래가 험상궂은 표정이나 태도를 보이지 않았음에도 그 크기와 아우라에 압도되어 지레 겁부터 먹은 것이었다.

 “[용왕님 가라사대]가 생겼다 하여 덕담을 쓰러 왔습니다.”

 “환영... 합니다.”

 대왕오징어는 썩은 미소를 띠며 패드 앞에서 물러섰다. 흰 수염고래는 진중한 낯빛으로 글을 써 내려갔다.

 -바다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 그 끝이 좋지 못하리라.

 대왕오징어의 표정이 울그락불그락 달아오르더니 그 아래에다 이런 글을 갈겨 달았다.

 -용왕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자, 종래에 재앙이 있으리.

 두 마리의 거대한 생물이 맹렬한 기세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진정 반역을 일으킬 셈입니까?”

 “민심이라는 명분이 있으면 반역이 아니라 혁명입니다.”

 “민심이라니, 하긴 착각도 자유니까.”

 “용왕님의 계시까지 뒷받침되면 이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겠지요.”

 “당신 꿈에 용왕님이 나온다는 걸 어떻게 믿는단 말입니까?”

 “용왕님의 행보를 의심하다니, 오호통재라...”

 “내일이라도 대왕문어님이 모습을 드러내시면 어쩌려고 이럽니까?”

 “저는 그저 용왕님의 뜻에 따를 겁니다. 만약 제가 선택된다면 기꺼이 이 한 몸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구요.”

 “백 번 양보하여 당신이 선택됐다 치고, 물살이들이 통치를 마음에 안 들어하면 어쩔 겁니까?”

 “오직 물살이들이 배불리 먹고살기 위한 청사진을 펼쳐 보일 텐데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대왕이 되기 위해 그럴듯한 청사진을 내보이는 건지, 진정 품고 있는 청사진을 펼치기 위해 대왕이 되려는 건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니, 그걸 대왕을 해본 적도 없는 제게 물으면 어떡합니까?”

“만약 물살이들이 대왕오징어의 통치에 반발할 시, 인간계의 투표를 적용해 물러날지 말지를 결정하는 조항을 만들어도 되겠습니까?”

 대왕오징어는 난파선에 있는 물살이들을 스윽 둘러보았다. 그 누구도 선뜻 지느러미를 올려 이의제기하는 이가 없었다. 괘씸하기 그지없었지만 일단은 동의를 표해야겠다고 판단한 대왕오징어는 고갯짓을 해 보였다.

 “이 조항의 개설 여부 역시 투표로 결정하도록 하지요. 흑명태는 당장 이 대화들을 기록하고 그 아래 익명 투표 칸을 만들라.”

 졸지에 임무가 떨어진 흑명태는 대왕오징어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대왕오징어는 흑명태 따윈 안중에 없단 듯 눈알에 핏줄이 터지도록 힘을 주어 흰 수염고래를 노려보았다. 흰 수염고래 역시 지지 않고 물풀 같은 수염들을 곧추세워 시야를 단박에 차단해 버렸다. 

  “이토록이나 저를 경계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군요.” 

  “대왕도 한낱 물살이일 뿐인지라 감시와 견제가 필요한 법이지요.”

 불꽃 튀는 기 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흑명태가 잽싸게 난파선 위로 올라갔다. 대왕오징어의 심중에 반하는 임무이긴 했지만 많은 물살이들이 중립적으로 지켜보고 있었던 만큼 받들 필요가 있었다. 패드에 기록을 남기는 동안 물길을 지나가던 몇 물살이들이 호기심에 다가왔다. 개중에 몇 마리는 투표를 하기도 했다.

 밤이 깊었다. 모든 생물들은 오늘따라 파도가 험하다는 것을 해면의 진동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런 날이면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잠이나 청하는 게 상책이었다. 조류 역시 가파르게 흐르고 있어 금방이라도 뭔가가 확 뒤집히며 판세가 달라질 것만 같았다. 묵직한 어둠을 품고 있는 난파선에선 곧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할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난파선 앞 모래밭에서 별 모양의 생물 하나가 훅, 솟아올랐다.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처럼 가볍기 그지없는 그것은 네모난 불을 밝히고 있는 패드 앞으로 송송 다가갔다. 그곳엔 방금 구워낸 듯한 꿈 이야기가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꿈에 나타나신 용왕님 가라사대, 이레 전 대왕문어는 인간계에서 문어숙회가 되었기에 ‘대왕’이란 칭호를 박탈시키는 바, 오징어는 본래 네 이름을 찾으라고 하셨느니라.

 진한 글씨 아래로 별 모양이 요리조리 움직이는가 싶더니 다음과 같은 두 음절이 달렸다.

 -개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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