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거북과의 조우]
방문객들은 관람이 끝나면 하나같이 요의를 느꼈다. 화장실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면 보이는 건 기념품 샵뿐이었다. 화장실 위치를 묻기 위해 샵에 슬쩍 발이라도 들여놓을라치면 메이드 인 베트남이 붙어있는 수백 개의 봉제인형들이 일제히 추파를 던졌다. 평소 인형에 관심이 없는 방문객들도 그 추파에 홀려 스윽 둘러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중 두어 개는 자신의 취향에 들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지금부터 30분 동안 20% 할인’이라는 문구의 전광판이 머리 위에서 반짝이기라도 하면 판단력이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눈으로 확인한 가격표에 놀라 망설이는 게 대부분의 수순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온 김에 뭐라도 하나 사갈까 싶어 조약한 볼펜이라도 만지작거리고 있다 보면 결국 요의를 참을 수 없게 되어 후다닥 계산대로 직행하게 되었다. 기념품을 손에 쥐고 나오면 신기하게도 이때까지 보이지 않던 화장실 팻말이 눈앞에 나타났다. 참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아쿠아리움이 아닐 수 없었다.
폐장 시간이 되자 방문객뿐 아니라 아쿠아리스트도 일제히 빠져나갔다. 아쿠아리움엔 오직 바다생물만이 남았다. 회의 날을 제외한 지하세계는 고요함 그 자체였다. 그러나 오늘은 보통날과 달리 생물 하나가 분주히 돌아다니며 적막을 깼다. 몸을 납작하게 만든 뒤 수조 뚜껑 사이를 빠져나온 옥토가 cctv가 없는 사각지대만을 골라 돌아다니고 있었다. 수조 속의 바다생물들은 이따금 옥토에게 눈길을 주었지만 곧 시선을 거둬버렸다.
“아이고, 제가 대왕문어님을 알현하러 가야 하는데 이렇게 친히 오시다니요...”
바다거북은 수조 너머 자신을 보러 온 옥토를 향해 눈물을 쏟아냈다.
“아아... 대체 이게 얼마만이냐!”
옥토는 거북 수조에 붙어있는 한글을 대강 살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모래밭에서 구조되었다고?”
반가운 인연 앞에서 옥토는 무람없이 과거의 말투가 나왔다.
“아니요. 저도 대왕문어님처럼 잡혀왔습니다. 모래밭에 알을 낳고 바다로 돌아가던 중 인간들이 우르르 나타나...”
바다거북은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머리카락이 긴 인간 여성만이 유일하게 저를 풀어주자고 했어요... 하지만 다수결로 인해 그 뜻은 무산되었지요.”
옥토는 그 여성이 영인임을, 또한 그녀가 어떤 표정으로 바다거북을 놓아주자고 말했을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제 수조에 붙어있는 글 너무 가증스럽지 않나요? 특히 마지막 문장 [거북이를 위해 일회용 빨대 사용을 자제해요. 우리 모두 탄소중립실천을 위해 대중교통을 생활화해요.] 허 참, 인간들 이중성 진짜 역겹다니까...”
옥토는 자신의 발치 주변에서 뒹굴고 있는 일회용 빨대와 도장이 찍힌 주차권을 바라보았다. 평소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쓰레기더미였다.
“그래도 여기서 대왕문어님을 만났으니 잡혀온 보람이 있네요. 어떻게 그동안 이런 곳에 갇혀 계셨던 거예요? 아까 대왕님이 인간 앞에서 묘기 부리는 걸 보곤 눈물이 앞을...”
옥토의 표정이 낭패로 일그러지자 바다거북은 급하게 입을 닫았다. 옥토는 그 시절 위엄을 갖추었던 자신의 모습을 되살려보기 위해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래, 바다는...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가?”
“겉으론 달라진 게 없어 보이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다고나 할까요? 그러니 어서 왕좌에 다시 오르셔요. 저와 함께 탈출하자구요!”
아쿠아리움에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단어, ‘탈출’이 지난날 충복이었던 이의 입에서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옥토는 자신이 믿고 있던 견고한 세계의 한 축이 와르르 무너지는 걸 느꼈다.
‘그래... 나는 질서와 규칙으로 바다 세계를 평정하던 대왕문어였어. 인간들 앞에서 재주나 부리고 박수나 받는 광대 따위가 아니었어... 나는 통치자였단 말이다! 아아,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옥토는 이때까지 길고도 아득한 꿈을 꾼 것 같았다. 꿈속에선 분명 이 세계가 현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눈을 뜬 이상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
“마음을 정했느니라. 짐은... 탈출할 것이다.”
“참으로 현명한 결단이십니다. 대왕문어님.”
바다거북은 한 생물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가는 모습을 기쁘게 지켜보았다.
“내 너무 오랫동안 타성에 젖어 있었느니...”
“내일이라도 당장 저와 함께 탈출하시죠.”
“먼저 떠나거라.”
“네?”
바다거북이 모가지를 치켜들었지만 수조 밖의 옥토는 준엄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떠나기 전 이곳에서 마무리 짓고 가야 할 일이 있느니라.”
영인과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이렇게 떠날 순 없었다. 내일 있을 쇼 타임 때 어떠한 시그널을 보낸다면 영인은 기꺼이 그 뜻을 알아들으리라... 옥토는 이별할 생각을 하니 슬픔이 앞섰지만 모든 만남엔 시작과 끝이 있는 법이라고 자신을 다독거렸다.
“그럼 언제쯤 탈출을 하실 건지...?”
“잡혀오던 날 달 모양을 보았는가?”
“보름달이었습니다.”
“다시 만월을 볼 수 있기 전엔 반드시 도착하도록 하겠다.”
“만월의 빛이 부서지는 밤바다에서 대왕님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옥토는 수조로 돌아가는 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한 여름밤의 꿈이 참으로 길었지 뭐야... 참으로 지독한 악몽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