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이별한 지 한참이 지났다. 무의식적으로 번호를 누르다 화들짝 놀랐다. 아! 나 이 사람과 헤어졌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수순을 밟은 이별이었다. 헤어져도 가슴 아플 것도 없을 만큼 서로에게 실망했고, 재미도 없는 관계를 끝냈다며 눈물도 나지 않았던 이별이었다. 그런데 이 버릇처럼 눌러버린 전화를 허겁지겁 끊으려 했더니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왜 무슨 일 있어?”
내 번호인 것을 알고 상대는 물었다. 참 이상했다. 그냥 인사였을 뿐인 그 마지막 한마디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왜, 무슨 일 있어?”
맞다. 난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그에게 의지해서 잦은 전화를 했었다. 어떤 날은 속상한 마음에 전화를 하고, 어떤 날은 기쁜 마음에 전화를 하고, 새로운 공부를 하게 되어도, 누군가를 헐뜯고 싶을 때도 연락을 했었다. 그렇게 모든 ‘무슨 일’ 속에서 늘 그와 함께 지혜를 구했고, 위로를 받았고, 그렇게 쌓인 시간들이 어리석었던 사람을 무르익게 해서 혼자 설 수 있을 만큼 성숙하게 만들었다.
이런 일이 떠오른다. 오래전 작은 주얼리샵을 오픈했을 때 자금 회전이 어려워 발을 동동 굴렀던 그날도 그랬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근심 가득하여 물으니 그는 “발을 동동 굴러도 해결될 일이 아니라면 마음이라도 편히 두면 어때? “라고 답해줬다. 지금도 어려운 순간마다 그 말이 떠오른다. ‘지금 이렇게 발만 동동 굴러도 해결될 상황이 아닌데, 내 마음은 편하게 두고 있는지?’ 점검을 하면서 그의 조언을 떠올린다.
아! 이 눈물은 그리움의 눈물이 아닌 고마움의 눈물이었구나. 또한 안심의 눈물이었다. 비록 이제는 연락을 하지 않으며 살지라도 늘 마음으로 응원하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는 따뜻한 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시절인연으로 우린 이제 서울 하늘 아래 사는 것 외엔 서로 부딪칠 일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종각의 작은 LP 바에서, 한강 둔치에서, 그가 걸었을지 모를 거리들과 그가 앉았다 간 탁자 위의 흔적을 손으로 쓸어볼 수 있다는 것이 내게 위로가 된다. 같은 하늘,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헤어질 때 했던 약속이 있었다. 서로가 유명해져서 TV에 나온다면, 그리고 그 순간 내가 친구들에게 “나 저 사람 잘 안다, 엄청 친하다”라고 했는데 사람들이 안 믿어줄 때… 전화 걸면 꼭 받아주기로. 그렇게 서로의 잘된 미래를 축복해 주자고 했었다. 십수 년이 흘렀는데도, 그 약속은 여전히 유효할까?
헤어졌어도 한 사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는 멋진 사람의 친구였다는 것, 그것이 내겐 가장 큰 이별의 선물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들이 그와 자주 음악을 들으러 왔던 LP 바를 오게 했다. 마침 알란 파슨즈 프로젝트(The Alan Parsons Project)의 ’ 올드 앤 와이즈(Old and Wise)’가 흘러나온다. 슬픈 멜로디에 읊조리듯 나오는 가사에는 우리들의 이야기처럼 세월이 흘렀고 우린 많은 경험들을 했으며, 그리하여 삶의 풍파를 지혜롭게 타고 가는 나이 든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는지를 되묻고 있다. 음악을 음미하며 너의 충고대로 난 씩씩하게 내 삶과 내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살고 있으니 너도 어디에서든 빛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기를 흐르는 눈물과 간절한 마음을 담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