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그런 내용이었다. 저 새하얀 게 떨어져 내리는 예쁨보다, 저게 쌓여 얼기 전 치워야 하는 고생스러움, 또는 그게 녹아 더럽혀질 거리 생각에 께름칙하고 그곳을 걷느라 망가질 신발 걱정이 앞서면 어른이 된 거라고.
듣고는 그랬다. 눈이 싫어진다고? 거짓말… 그리고 역시 인생은 거짓말 같았다. 언제부턴가 어랄라? 싶더니 내가 딱 저리 됐다. 눈 치울 고생까진 해당이 안 됐지만 뒤에 두 가지에는 영락없게.
‘오 눈이시여. 이제 나에게 눈이시란, 아이들의 그것이 아니라네요’ 마음 먹으니 행동이며 감정이 되게 의식적으로 제한됐다. 이를테면,
나는 어른이다. 눈을 싫어해야 한다. 눈은 겨울이란 계절에선 상징이지만 겨울철 일상에선 골칫거리일 뿐이다. 눈 보고 설레면? 주책. 그건 동네 바둑이나 꼬마들의 영역으로 보존하자. 눈싸움? 흰 눈으로 하는 거보다 내 작은 눈으로 하는 게 승산이 높다. 지는 싸움은 하는 거 아니다.
하는 식으로. 눈싸움이며, 첫눈에 동기화되는 감정에 연령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사고 한 번 참 쓸데없이 편협해졌다.
그렇게 제법을 겨울의 낭만에 취하지 않는 건조한 현대인인 척 지냈다. 첫눈이 언제 올까? 궁금한 적이 최근 몇 년 동안 없었다.
그러다 나의 엊그제. 야근 후 퇴근길. 피곤한 형광등 불빛으로 가득한 정사각형 방에서 얏호! 하며 나온 걸음이 건물 밖으로 한 발짝을 떼기 무섭게 멈췄다.
밤 열한 시. 캄캄한, 나 말곤 없던 그곳. 정적 자체였던 그 모든 것은 분명 환희였다.
세상이 오프 된 것 같은 시공간에 하얀 별가루가 바람을 타고 꽃잎처럼 휘날리는 성스러운 광경.
내 30대 마지막 겨울의 첫눈인 동시에, 내 인생에 내려왔을 서른아홉 번의 첫눈 중 가장 잊지 못할 첫 번째 눈이었다.
건조한 현대인은 어디 갔을까. 웬 토끼 한 마리가 깡총깡총. 조금 소름 돋게도 첫눈이라며 방방 뛰었던 잊고 싶은 기억이 굳이 명확하다. 그래도 이해해 줄 수밖에 없는 것이,
까만 밤과 하얀 눈과 휭하는 바람. 거기에 혼자인 나. 이 서정적인 걸 어떻게 싫어해. 무슨 수로 외면해. 난 그렇게 독하지 못해. 난 세상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모든 감성들에 무책임할 정도로 취약해. 최선을 다해 과몰입해. 감성을 거둔 인생은 게임 속 세상이랑 다를 게 없어.
달콤함은 오래 가져갈 수 없는 법. 과몰입이 깨지기까지는 몇 시간 걸리지 않았다. 한밤 느닷없이 출몰한 감성충의 세계관은 다음날 아침, 흔적도 없이 붕괴됐다.
간밤에 마치 알프스의 숙녀, 북해도의 여인, 눈의 정령이라도 되는 양 첫눈을 대하는 자세가 오바 육바였다면, 기어이 밝고만 아침엔 눈에 대한 원망이 원망이.
지하철로 출근하며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 같은 날은 지하철 말고 레일바이크로 출근하는 게 더 편할 수도 있겠다고.
그래서 정리했다. 눈이 싫어지면 어른이란 말에 동의하지 않기에. 일반화하기엔 너무 사람 타는 대상이니까 눈은. 대차게 내린 이번 눈으로 나는 그 말에 관한 나만의 새로운 정의를 내렸으니. 그건 눈이 싫어지면 누구가 아니라 ‘언제’로 하는 게 더 어울리겠다는 접근이다.
눈이 싫어지면? 어. 출근날.
눈이 싫으면 그건 출근하는 날. 출근한 날. 해야 할 퇴근이 있는 날.
감히 확언한다. 쉬는 날 내리는 눈은 낭만일 수 있어도 근무하는 날 내리는 눈은 뭘 헤아려보고 가정해 보고, 가타부타할 것도 없다. 그건 그냥? 넌씨눈이다.
물론 하늘세상이 인간세상 달력 봐주며 움직일 수 없다는 건 너무 이해한다. 어디든 다 각자만의 사정과 역할이 있는 거니까. 그럼에도 그 위에선 먼지만한 크기로도 안 보일 나란 녀석의 이 외계어 같은 낙서를 어쩌다 운 없게도 보신다면, 다음 눈은 조금 소담하게 내리게 해주시면 여러모로 좋을 것 같다. 낭만만 가져가고, 장애물은 안 될 정도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