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는 말이야"
꼰대의 네임택으로 여겨지는 말.
유머인양 돼버렸지만 결코 유머이지만은 않은. 시대와 세대를 네 때라면 그럴 수 있는 거여도 '라 떼'하면 일단 고리타분하다 구분 짓고 보는. 결국 그 선천적 뜻보다 후천적 해석이 말을 잡아먹은 아주 묘한 말이라고, 나는 풀이한다.
그런다면서 어르신의 라떼를 들을라치면 앗부터 하는 건... 띵행불일치. 이럴 때면 자기반성과 함께 뇌가 인간의 신체 전 기능을 관장하는 게 맞나 의문을 갖는다는 고백도 하는 바.
애니웨이. 이런 내가 한 번은 글쎄 이 말에 구슬퍼졌으니. 대체 왜? 나는 영문 모를 이 감정의 원인을 알아야만 했다.
낼모레 불혹이니, 나 역시 혹자에겐 꼰대일 나이이자 그 말이 겉돌지만은 않는 예비 꼰대라서 그런걸까?
반박은 못 하겠지만 반박 하고 싶어지기에 지금 내 꼰밍아웃 여부가 중요한 건 아니라고 어렵게 정줄 잡으며, 라떼는 말이야가 별의별 감정선 끝에 구슬픔으로 갔던 이유를 나는 이렇게 정리했다.
라임 살린 위트 있는 표현에, 시대 잘 만나 유명세도 톡톡히 치루며 제법 잘 나가는 것 같지만 그래봤자 언어학 쪽에서의 포지션은 개그캐&꼰대캐인 녀석.
근데 왜 자꾸만 그게 이 녀석의 전부, 진짜는 아닌 것 같은지. 지금은 이 모냥이지만, 따져 보면 사실 굉장히 유서 깊은 가문의 혈통인 거 아닐까? 이를테면 그리움을 가풍으로 둔 일가의 후손이고 뭐 그런 거 있잖아. 하는 생각에 시달리기를 수...분. 내 밑도 끝도 없는 감정의 기원을 알았으니,
그 족보를 좇자면 아주 멀리, 오래가야 할 터라 내가 아는 가장 가까이에서 그 역사를 꼽아보자면 이렇다.
<생각만 해도 사람을 아득히 촉촉해지게 만드는 유전자를 나눠가진 말들에 대하여>
처음엔 '옛날옛적에'로 시작했던 것이 얼마 안 가 '그땐 그랬지'가 되더니, 한 유행가에선 '1994년 어느 늦은 밤', 다른 곡 에선 '그 해 여름'이라는 글자를 빌렸다.
추상적이고 건조하던 것이 명확하면서도 고급스럽게, 거기다 감성적으로 변한 것.
헌데 또 변했다기보다는 위대한 문자를 나라말로 가진 덕에, 생김은 다르면서 결은 같이 하는 말을 무수히 가진, 표현의 부를 누리며 사는 결과란 해석이 더 맞을 테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 드는 생각은 내일 퇴근길에는 광화문 광장에 들러야 할 것만 같은 뭐 그런 거고.
다시 라떼의 신세가 구슬퍼진 이유를 이어가 본다면 핵심은 거기에 있었다. 얘도 분명 그 집 핏줄이라는 거. 그 정서는 의심의 여지 없는 그리움일진대! 얼핏은 훈계 같고 어떻게는 어쩌라고 싶은 무용담, 또 많은 때엔 이 모든 걸 가장한 자랑... 같으니 문제였던 것.
훈계랑 무용담을 가장한 자랑이든 뭐든 결국 바탕엔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된통 깔린 것인 거늘, 어떻게 오해를 이렇게 직살나게 받을 수 있는 거지?
이게 다여도 불쌍한 마당에 조상들의 삶과 비교하면 구슬픔은 한층 더 레벨업된다. 후손 라떼는 단단한 오해를 받으며 조롱과 무시 속에 살지만, 그 조상들은 아니었기 때문.
옛날옛적부터 그 해 여름까지. 단 한 번의 저항 없이 과거로 스미게 하는 주문과 같은 이 말들에 대다수가 열광했다. 그들의 사회성은 실로 굉장했다.
어느 대상과 만나던 미친 시너지를 보여줬는데, 예를 들어 그 말들이 멜로디와 만났다? 그리움은 그때부터 연중무휴. 노동법 위반이 우려될 정도였고. 그 말들이 곱디고운 청춘남녀의 얼굴 혹은 쓸쓸한 노년의 뒷모습과 만난다면 마음은 벌써 잠금해제. 사연도 모르는 그들 감정에 너도나도 동기화 돼버렸으니 개인정보 유출이 걱정될 지경이었다고 하면 될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니, 나한테 얘 신세가 어찌 안 처량할 수가 있을까.
라떼는 말이야란,
누군가에게 건넨 대화인데,
하면서는 독백이요 하고 나선 잠꼬대마냥 들은 이 없이 돼버리는 가여운 마음인 것.
나 사는 게 바쁘고 중하니, 나한테 필요한 게 아니다 싶으면 저절로 필터링되고 관심·
집중·공감… 그 투자들도 자동 on/off 되는 매정한 하루. 하물며 이젠 그마저도 숨소린 없이 목소리만 내는 AI가 이 사람 저 사람을 대신하는. 내 말을 넘어 나를 나눌 '사람'이 귀한 세상에서,
라떼는 말이야는 '나 그 시절이 그리워' '너랑 대화하고 싶어' '나도 그런 때가 있었어'라는 마음을 그런 티 덜 내며 건네고 싶을 때 쓰는 말이 아닐까? 만-에 하나 아무도 대꾸를 안 해 민망하더라도 그저 시쳇말 한 번 해본양 해버리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물론 아닐 수 있다. 밈 같은 것일 수도. 근데 나는 어쩌면 대부분의 라떼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몹시나 동했다.
이렇게 정리가 되었으니 내일부터 무수한 날. "라떼는 말이야"라고 하는 이가 있다면 엇 할 게, 미간을 찌푸릴 게, 웃을 게 아니라 잘 들어줘야겠다고 마음 잡는다.
필시 그 사람은 훈계하자는 것도 자랑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것. 그때가 그립거나 지금이 외롭거나,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거나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