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엽기토끼가 그려져 있는 핑크색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엷은 베이지색 상의에 고동색 치마를 입고 슬리퍼를 신은 모습은 약간 불량스러운 느낌을 연출하고 있었다. 치마의 길이를 의도적으로 줄인 듯 무릎 위를 한참 올라간 치마는 가까스로 팬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그녀의 허벅지를 둘러싸고 있었다. 버스에 올라탄 그녀는 비어있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힐끔 그녀를 쳐다보았다. 짧은 치마 속 하얀 팬티가 보일락 말락 내 시선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 시선을 즐기는 듯 내 옆으로 두 다리를 더욱 밀착시켜 다가왔다. 순간 그녀의 오른쪽 무릎이 내 왼쪽 무릎에 닿았다. 닿는 순간 그녀는 무릎을 떼더니 조금 시간이 지나고 다시 무릎을 갖다 대었다.
“이건 뭐지?”의아해하는 나의 표정을 바라보며 그녀는 이런 동작을 열 번쯤 반복했다. 그녀의 무릎이 내 무릎에 닿는 동작이 반복되자 나는 나도 모르게 그 감촉을 즐기게 되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그녀는 나를 보며 야릇하게 웃는다.
“나 이번 역에 내려요.”라고 그녀는 말하였다.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녀가 일어서자 같이 일어서게 되었다. 그녀를 따라 버스에서 내린 나는 그녀를 보며 뒤에서 따라갔다. 그녀는 가끔 뒤를 돌아보며 나를 보고 미소를 지어 주었다.
분홍색 슬리퍼의 따박따박 소리에 이끌려 따라가던 나는 슬리퍼의 모양이 익숙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이었던 그녀가 교실에서 신던 분홍색 슬리퍼를 떠올렸다.
그녀는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교생으로 온 사범대 4학년생이었다. 남자 형제들 사이에 자라고 남자중학교와 남자고등학교를 다닌 나에게 그녀는 처음 보는 신세계였다. 그녀가 처음 교실에 들어왔을 때 모든 학생들의 눈길이 머문 곳이 그녀의 슬리퍼였다. 핑크색 슬리퍼는 남자 선생님들의 검은색 구두와 검은색 슬리퍼만 보아 왔던 남고생들의 눈에 강렬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물론 그녀의 얼굴과 몸매가 먼저 관심을 끌었지만 분홍색 슬리퍼가 없었다면 평범하게 느껴졌을 아담한 몸집의 그녀는 슬리퍼로 인하여 더욱더 남학생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독일어를 가르치던 그녀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나의 눈은 그녀의 슬리퍼로 향했고 이어서 그녀의 치마 밑 날씬한 종아리를 거쳐 조그마하고 화사한 얼굴로 초점이 이어지곤 했다. 대학입시에서 제2외국어를 제외하고 상업을 선택하려고 했던 나의 생각은 그녀의 등장으로 제2외국어인 독일어를 선택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독일어를 선택한다는 미명 하에 자주 교무실에 들러 그녀로부터 교과 상담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뜻밖의 수확이었다.
“해인이가 독일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야. 요즘 학생들이 일어나 중국어를 많이 선택하지만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이고 독일어는 선택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어 잘 만 하면 가능성이 무궁무진할 거야. 해인아, 언제든지 궁금한 것 있으면 나에게 와서 상담하렴.”하며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주던 그녀의 볼에 파이던 볼우물과 하얀 치열을 나는 밤마다 떠올리곤 했었다. 한창 이성의 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던 나는 그녀가 입은 스웨터 위로 불룩 튀어나온 가슴의 곡선과 날씬한 다리를 생각하며 매일 밤 수음을 하였다. 나는 밤마다 채워지지 않는 그녀에 대한 갈증을 그런 식으로 배출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한 달 여의 시간이 꿈같이 흘러갔다. 교생실습기간이 마무리되자 그녀는 다니던 대학교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많은 남학생들의 아쉬운 눈길을 뒤로하고 그녀가 떠나던 날 나는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학교 앞 골목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나를 보며 반가워하는 그녀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선생님 한 달 동안 열심히 가르쳐주셔서 고마워요. 그리고 이 꽃은 제 마음이에요. 제가 대학교에 들어가면 정식으로 선생님에게 사귀자고 프러포즈할 생각인데 선생님 마음은 어떠세요?” 나의 말에 그녀는 놀란 듯했지만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해인아, 고마워. 나를 그렇게까지 좋아해 줘서. 지금은 고등학생이라 만나는 여자가 없어서 그렇지. 해인이 정도면 대학 가서 좋은 여자들 많이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때는 내가 사귀자고 해도 네가 싫다고 할 걸. 후후.”하며 그녀는 가방에서 교생실습기간 내내 사용하던 독일어 교본과 독일어 사전을 꺼냈다.
“이 건 너에게 주는 선물이니 이걸로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꼭 합격해야 돼.”나는 그 책을 받으며 속으로는 “선생님이 신던 슬리퍼를 선물로 주시면 안 돼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떠나고 이듬해 나는 대학에 합격했지만 그녀를 다시 만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귀던 남자 친구와 결혼을 한 후 둘이 같이 독일로 유학을 갔기 때문이었다. 나의 사춘기를 불면의 밤으로 가득 채워 주었던 첫사랑은 분홍색 슬리퍼와 함께 연기처럼 사라졌다. 책꽂이 한쪽에 꽂혀 있는 오래된 독일어 교본과 독일어 사전만이 그녀의 흔적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나는 생각을 멈추고 커브를 돌아 빌딩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따라 건물 안으로 입장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두 남자가 나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퓨처 리빙의 세계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부터 귀하는 교육을 통하여 새로운 매니저가 되실 것입니다. 귀하는 아직 클로버 등급이지만 다이아몬드 등급으로 계신 회원분의 추천을 받으셨으니 특별히 신경을 써서 교육해드리겠습니다.” “아니 누가 다이아몬드 등급이고 누가 나를 추천했다는 겁니까?”내가 따지듯 묻자 두 남자는 동시에 분홍색 슬리퍼를 신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축하드려요, 퓨쳐 리빙의 세계로 오신 것을...” 여자는 손을 흔들며 나를 보고 방긋 웃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