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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지만 특별한 날

콩도 털리고 나도 털리다

지금은 새벽 3시다.

나의 의지로 새벽 3시 기상이 가능함을 새로이 안 날이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을까?


매년 벼 수확이 끝날 즈음이면 남편은 콩 타작을 하러 시골에 간다. 요즘은 벼농사도 기계화가 많이 되어 있어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두 분이서 거의 다 하시지만 콩 타작은 여러 사람이 손이 필요한지라 항상 남편을 부르곤 한다. 토, 일요일 독서모임도 있어서 읽어야 할 책도 있지만 일단 바리바리 싸들고 동행하기로 했고 금요일 밤 10시에 출발해서 3시간 만에 도착했다.


토요일 아침식사 후 시부모님과 남편은 콩 타작하러 나섰고 시어머님은 설거지, 청소 부탁하시며 기계가 타작하니 일하러 나올 필요가 없다고  하신다. 농사일은 잘하지도 못하고 힘든 일들이 많아서 시골에 내려가면 잠깐 1~2시간 거들거나 식사 준비를 하는 정도만 하는 경우가 많다. 남편에게는 일을 시키지만 며느리에게는 잘 시키지 않으려고 하신다. 남편도 집안일이나 도와달라는 정도다. 그래서 하고 싶어진다. 남편이 고단수인  듯.


낭독 독서모임, 설거지, 시집 필사 2기 사전 줌 모임으로 서로 소개를 한 후 논으로 향한다. 노트북 하나로 이런 시골에서 줌 만남을 하다니 과거와 미래로 타임머신을 타고 왔다 갔다 하는 기분이다. 06시 '트렌드 코리아'낭독 모임에서는  2022년 트렌드 '나노 사회' 부분을 낭독했는데 책에 나온 것처럼 집단적 정체성보다 개인적 취향이 더 강해짐을 느낀다.  그래서 취향이 비슷한 사람끼리 소수 온라인 낭독 모임도 참여하고, 내가 진행하는 시집 필사('천 개의 아침, 메리 올리버 지음)도 온라인으로 만남이 가능한 것이다.


멀리서 보니 논두렁 옆 도로에서 콩 타작 기계 소리가 들린다. 탈탈 탈탈~ 콩이 탈탈 털리고 있군.

시어머니는 기계가 다 알아서 하니 할 일이 없다며 들어가라고 하셨지만 내가 보니 여러 사람 일손이 필요한 일이었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트랙터 바구니(트랙터 버킷)에 며칠 전에 베어 둔 콩줄기를 담아온  후 콩 타작 기계 입구에 줄기 전체를 집어넣는다. 탈탈 털린 콩줄기 몸체들이 나풀나풀 떨어지면 시아버지는 모아서 논두렁에 버린다. 콩이 통통통 떨어지면 포대자루가 입을 벌려 수십 개씩 쏙쏙 받아먹는다.


'나는 무슨 일을 하면 되려나' 쭈~욱 상황을 보았더니 남편이 콩 타작 기계에 콩줄기를 넣을 때 조금씩 집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옆에서 거드니 더 많은 콩들이 포대자루에 차곡차곡 들어가고 금방 차오른다. 마치 물이 차오르듯. 만만한 일은 아니지만 이 차오르는 기쁨이 농사일하는 재미가 아닌가 싶다.


슬금슬금 나의 몸들이 아우성친다.  콩줄기들이 억세고 딱딱해서 한 움큼씩 집어 남편에게 건네려고 하니 장갑과 옷 위를 뚫고 콕콕 찔러서 따갑다. 쌓아둔 콩줄기가 줄어들수록 허리를 구부려야 해서 허리도 아프다. 농사일에 달인이신 시아버지는 트랙터를 중간중간 허리를 구부릴 필요 없도록 쓰윽 쓰윽 올려주신다. 손가락을 쫘~악~짝 벌려서 콩줄기를 집으려고 하니 손도 아프다. 마스크를 썼지만 날리는 먼지들로 눈도 따갑고 몸이 근지럽기도 했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1~2시간 지날 즈음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고 시부모님은 몇 날 며칠하고 계시니 멈출 수가 없었다. 우리가 가고 나면 두 분이 하실 텐데 조금이라도 더 해드리고 가면 좋겠지. 내가 해보니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왜 남편을 부르셨는지 아니까.


새참 시간과 점심시간이 무척 반가웠다. 평상시 출출하면 먹었던 간식과 시간 되면 자연스레 먹는 점심과는 달랐다. 기쁨에 찬 휴식시간이라는 점이 추가되니 더 달게 느껴지고 짧은 시간이 더 귀하게 느껴졌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단단히 무장하고 나갔다. 손톱이 부러져 짧게 자르고 긴 팔 옷 위에 팔 토시도 하고 나섰다. 부러진 손톱은 콩줄기를 집을 때마다 아릿아릿 아파온다. 아프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프로 농사꾼들 앞에서 엄살을 피우고 싶지 않았고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오후 5시까지 검정 서리태 콩과 노랑 메주콩을 10포대 이상 털었다. 나의 체력도 다 털린 상태였다. 탈탈~


저녁 식사 후 남편은 8시에 곯아떨어졌다.

나는 일요일 밤 9시 경제스터디 모임에서 나눌 '미국 주식 무작정 따라 하기(장우석, 이항영 지음)'를 읽으려고 하는데 졸음이 쏟아져서 책이 자꾸 툭툭 떨어진다. 원래 토요일은 하루 종일 책 1권을 읽는 재미에 빠진다. 일요일 독서모임이 있을 때는 미리 읽는 것보다 전날 읽는 게 기억도 잘 나서 정리하기도 편하다. 오늘은 책 있는 재미보다 콩 타작으로 하루를 보냈다. 항상 책을 다 읽고 독서모임에 참여하는 편이지만 내일은 힘들 것 같다. 내 몸을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콩에게 바친 하루다.


9시도 되기 전에 잠든 나는 새벽 3시에 눈이 떠졌다. 6시간 이상 푹 잤다. 집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9시 이전 취침 시간, 새벽 3시 기상이 가능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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