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수장작가의 한강의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에 이어 '채식주의자'를 읽었습니다. 앞서 두 권 읽을 동안에도 희뿌연 안개가 머리에 쌓인 채 읽었는데요, '채식주의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권보다는 쉽게 읽었지만 내용에서는 충격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이어져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읽은 후 하루 이틀 사색하고 산책하면서 정리 후 후기를 쓰고 있습니다.
챕터 1 채식주의자
챕터 2 몽고반점
챕터 3 나무 불꽃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각 챕터별 제목이 그 내용을 아우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책에서 첫 챕터는 채식주의자입니다.
어두운 숲이었어. 아무도 없었어. 뾰죽한 잎이 돋은 나무들을 헤치느라고 얼굴에, 팔에 상처가 났어. 분명 일행과 함께였던 것 같은데, 혼자 길을 잃었나 봐. 무서웠어. 추웠어. 얼어붙은 계곡을 하나 건너서, 헛간 같은 밝은 건물을 발견했어. 거적때기를 걷고 들어간 순간 봤어. 수백 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대막대들에 매달려 있는 걸. 어떤 덩어리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어. 끝없이 고깃덩어리들을 헤치고 나아갔지만 반대쪽 출구는 나타나지 않았어. 입고 있던 흰옷이 온통 피에 젖었어
-20P
위 내용은 꿈 내용입니다. 꿈을 꾸고 나서 고기를 먹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냉장고에서 고기, 생선, 만두 등을 버리면서 남편과 언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평범했던 사람이(표현을 잘 안 하기는 했지만) 갑자기 꿈을 꾼 이후로 고기를 먹지 않고 남편에게도 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해주지 않으니 갈등이 심해졌죠. 그만큼 남편과는 대화가 되지 않을 만큼 데면데면한 관계가 지속되었음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가족들이 이 사실을 알고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언니(인혜) 집들이에 부모님과 가족들이 있을 때 건강 생각해서 고기 먹으라고 해도 먹지 않죠. 결국 아버지가 억지로 입을 벌려 고기를 쑤셔 넣고 영혜는 거부합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될 일인가요?
억지로 고기를 먹이고 먹지 않는다고 뺨을 때리는 아버지를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유를 물어봤어야지요. 이해를 하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먹으라고 한 부분에서 얼마나 많은 폭력이 지금까지 일어났는지를 알게 하는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서로 표현을 할 줄 모르는 가족 같았습니다.
영혜는 거부하다가 손목을 긋고 형부가 둘러업어서 병원에 갑니다. 병원에서도 고기가 든 음식을 거부하고 상의는 벗은 채 햇볕 쬐기를 좋아하죠. 마치 식물처럼 햇볕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요.
챕터 1은 영혜 남편이 화자입니다. 챕터 1 마지막 부분에 영혜는 병원 벤치에 앉아서 상의를 벗은 채 햇볕을 쬐고 작은 동박새를 손에 쥐었다가 떨어뜨립니다.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 있는 채로...
이 부분은 우리 인간이 고기를 먹는 부분과 동박새를 죽이는 부분이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 같아요. 육식을 하는 사람들, 폭력을 자행하는 사람들에 대해 반항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상의를 벗는 것은 지금까지 먹었던 고기들이 가슴에 얹혀 있어서 갑갑해서 옷을 입을 수 없는 영혜를 표현한 것 같고요.
챕터 1에서 사건만으로도 아주 폭력적이고 기이한 사건들이 많아서 놀라면서 읽었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대하는 폭력들, 동물에게 대하는 폭력들, 그것에 대해서 영혜는 대단히 예민한 감각을 가졌고 그것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챕터 2는 3인칭 화자로 영혜 형부(예술가, 비디오 아티스트)에 포커스를 둡니다. 병원에서 퇴원 후 언니 집에서 보내다가 따로 살게 되었는데 형부는 몸에 꽃을 그리고 비디오를 찍고 싶다고 영혜에게 제안을 하고 영혜는 수락하죠. 채식주의자였던 영혜에게는 꽃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고 무심하게 받아들이고 찍습니다. 결국 다른 남자를 투입해서 둘이 같이 찍도록 유도했죠.
그는 이번에는 노랑과 흰빛으로 그녀의 쇄골부터 가슴까지 커다란 꽃송이를 그렸다. 등 쪽이 밤의 꽃 들이었다면, 가슴 쪽은 찬란한 한낮의 꽃들이었다. 주황색 원추리는 오목한 배에 피어났고, 허벅지로는 크고 작은 황금빛 꽃잎들이 분분히 떨어져 내렸다.
-127P
예술인지 외설인지는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달려있는 것 같습니다. 외설인데도 아름답게, 작품성 있게 표현하면 예술로 승화되기도 하고요. 챕터 2가 그렇게 표현한 느낌입니다. 저는 그다지 예술로 와닿지는 않지만 책에서는 그렇게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예술로 보는 안목이 높지 않은가 봅니다.
거기다 형부가 자신의 몸에 꽃을 그리고 영혜와 관계를 맺는 부분도 그다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파격의 연속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단순하게 처제와 형부의 관계를 보고 경기도에서 청소년 유해도 서로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죠. 작품의 부분적인 묘사보다는 전체적인 메시지를 봐야 한다고 많이 이야기합니다. 저한테도 어려운데 청소년한테도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챕터 3에서는 영혜는 병원에서 음식을 거부하고 주사까지 거부합니다. 언니인 인혜는 묵묵하게 이해하려 애쓰며 돌봐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삶을 억척스럽게 살면서 하루하루 견뎌내는 인혜도 안쓰러웠습니다. 영혜에게 억지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주삿바늘을 연결하는 폭력성 부분이 언급되었는데요, 영혜는 결사적으로 거부하는데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저 껍데기 같은 육체 너머, 영혜의 영혼은 어떤 시공간 안으로 들어가 있는 걸까. 그녀는 꼿꼿하게 물구나무 서 있던 영혜의 모습을 떠올린다. 영혜는 그곳이 콘크리트 바닥이 아니라 숲 어디쯤이라고 생각했을까. 영혜의 몸에서 검질긴 줄기가 돋고, 흰 뿌리가 손에서 뻗어 나와 검은 흙을 움켜쥐었을까. 다리는 허공으로, 손은 땅속의 핵으로 뻗어나갔을까. 팽팽히 늘어난 허리가 온 힘으로 그 양쪽의 힘을 버텼을까.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영혜의 몸을 통과해 내려갈 때, 땅에서 솟아 나온 물은 거꾸로 헤엄쳐 올라와 영혜의 샅에서 꽃으로 피어났을까. 영혜가 거꾸로 서서 온몸을 활짝 펼쳤을 때, 그 애의 영혼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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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혜가 동생 영혜를 이해하려고 하는 부분입니다. 이런 마음의 표현을 미리 서로 했다면 자매 간의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보다 혼자 살아내려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라고들 하죠. 저도 그렇고요.
영혜는 왜 나무가 되고 싶어 했을까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으면서도 나무가 되고 싶어 합니다. 나무의 상징은 성장과 생명력입니다. 아이러니하죠? 연약한 영혜이기에 튼튼한 뿌리와 기둥으로 자신을 받치고 성장하고 싶어 하기도 하겠죠. 혼자 동떨어져 살지만 뿌리, 기둥, 가지로 서로 뻗쳐나가고 연결하고 싶은 마음도 느껴집니다. 나무는 혼자서도 잘 자라지만 무리 지어, 숲에서 더 건강하게 자라니까요.
죽고 싶다는 것은 살고 싶다는 뜻이 아닐까요? 가을에 잎이 다 떨어져 죽을 것 같지만 다시 봄이 되어 살아납니다. 영혜도 죽고 싶지만 다시 잎을 피우고 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나무라는 존재를 선택한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매일 시들시들해진 영혜가 잎이 나고 여름엔 푸르르며 가을엔 풍성한 나무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요?
이 소설을 통해서 작가는 무엇을 전하고 싶었을까요?
한강 작가는 인간이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몸부림이라고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폭력에 대항하는 방법이 채식을 선택하는 방법밖에 없었던 주인공 영혜, 몽고반점에서 성적 매력을 느끼고 자신만의 표현 방법을 찾았던 형부, 그것을 현실에서 묵묵히 살아가면서 지켜보고 이겨내는 인혜를 그리고 있습니다.
영혜는 삶을 포기할 만큼 저항하고, 형부도 이혼하고 자신의 삶을 내팽개칠 만큼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인혜만이 현실에서 이겨냈던 것처럼 고통스럽게 사건들을 받아들이고 직시하려고 하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작품에서 소통하지 않는 사람들의 한계, 극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그게 폭력이든 비윤리적이든 저항이든 소통이 없었기에 폭력까지 죽음까지 연결되는 게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읽고 나서 며칠 동안 고민한 흔적을 후기로 써보았습니다.
채식으로밖에 폭력에 저항하는 방법을 모르는 나약한 영혜지만 강한 나무가 되고 싶은 영혜의 스토리
*이탈리아에서는 '채식주의자' 연극이 매진되었다는 신문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