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으로 무리하게 일을 해서인지 어깨가 뻐근하게 다가오는 것을 무시했는데 재킷조차 입기 힘들 만큼 아파온다. 어깨를 풀어주면 나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점점 심해진다. 한의원, 정형외과를 다녀왔지만 특별한 병명은 없다. 침을 맞고 주사를 맞고 약을 먹어도 별 진전이 없어 보인 지가 2개월이 지나간다.
무엇이 문제일까?
무리했을까?
왜 처음 온몸의 신호를 무시했을까?
명상으로 아픈 곳에 집중하면서 에너지를 보내본다.
마사지를 받으니 굳었던 어깨가 조금씩 풀리고 있지만 병원에서 염증이 있다는 말에 여전히 약을 먹고 있다.
엄지발톱은 발톱대로 유치를 갈듯 새 발톱이 반쯤 올라왔다. 이 또한 새로운 신비다.
매주마다 달리다 보면 풍경이 달라지는 것을 보며 자연의 변화에 감탄하곤 했다. 아프다 보니 집 밖으로 나가기가 싫었고 그 좋아하던 벚꽃도 보기가 싫었다. 내 몸이 아프니 꽃이 보이지 않았다. 봄이면 꽃구경, 여름이면 계곡, 가을이면 단풍, 겨울이면 눈 구경을 하지 않는 건 자연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남편과 아이들을 끌고 나가곤 했는데 이번에 자연에 대한 예의를 잘 지키지 못했다. 그나마 벚꽃길은 지나가던 길에 잠깐 들렸을 뿐 정취를 느끼지도 못했다.
몸의 자그마한 신호를 놓쳐서는 안 되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나도 모르게 휙휙 집어던졌더니 아픈 어깨가 통증을 느낀다.
물건을 놓을 때도, 건네줄 때도 가만가만 주게 된다.
행여 행동이 느린 사람을 갑갑해 하진 않았을까? 갑갑해했다. 그들이 어떤 상황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뻐근한 어깨와 발톱은 나에게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달리는지 물어보면 건강하기 위해서, 집중력을 기르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달릴 수 있는 자체가 건강함이었다. 건강하니 달릴 수 있었다. 건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했기 때문에 달릴 수 있었다.
그 건강함의 에너지가 얼마나 컸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지금은 100m도 달리기 힘든데 21km 하프를 달린 에너지의 크기가 도대체 얼마일까? 물을 가르며 1시간 동안 강습받았던 수영할 때의 에너지는 도대체 얼마만 한 크기일까? 생명력이란 강인함 자체를 포함하고 있는 게 아닐까? 혹시 내 마음이 아팠던 건 아닐까? 조급함에, 성과를 내려고 급하게, 무리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