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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사진을 찍는다는 건

또다시 가을이 온다는 뜻.

by 그사이


며칠 전 집에서 조금 먼 곳을 가게 되었다.

낯선 곳. 수원.

생각해 보니 수원은 꼭 8월에 갔었다.


수원을 처음 가본 것은 20세기의 8월의 어느 날이었다.

밭주인이 노지 딸기를 바로 따서 차가운 지하수로 씻어 원두막으로 한 소쿠리 가져다주었다. 물기 어린 딸기는 크기가 제 마음대로였지만 반짝이는 빨간색이었고, 달고 새콤했다.

그곳에 인생의 봄을 맞은 남녀가 앉아 있었다. 원두막으로 부는 시원한 바람에 달큼한 딸기향이 실려왔다.


두 번째 수원을 간 것은 6년쯤 뒤의 8월.

검소한 분위기의 거실에 앉아있으니 사모님께서 찻잔을 앞에 놓아주셨다.

조용한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결혼을 축하하네."

뜨거운 여름의 싱그럽고 빨간 노지 딸기처럼 무르익은 남녀는 주례 선생님의 따뜻한 축하를 들었다.

그 수원의 여름 거실에선 은은하고 좋은 향기가 났는데 무슨 차였을까?


그리고 세 번째 수원. 21세기인 2025년 8월.

"이런, 주차할 곳이 없잖아."

"다른 데 가보자."

"뭐야! 여기도 주차할 곳이 없잖아."

"어쩐다. 카페 두 군데밖에 안 찾아뒀는데...."

"빨리빨리빨리 찾아봐. 여기 오래 정차 못한다고!"

"아유! 그 성질머리 하곤!"

흰머리가 숭숭 난 부부는 둘이 티격태격할 때는 여전히 청춘이다.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세 번째 카페는 앞마당이 꽤나 넓었다.

목백일홍(배롱나무)의 꽃이 한창인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구름이 하얀 솜사탕처럼 예쁘고 하늘의 파란색이 한층 깊어져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앨범엔 하늘사진이 늘어났다. 하늘을 자꾸 찍는다는 건 가을이 온다는 뜻이다.


곧 9월인데 아직도 뜨거운 해가 한 여름처럼 작렬한다. 여전히 이렇게 뜨겁다니.

가을이 오기 직전의 해가 더 뜨겁게 느껴지는 것은 불같은 여름 태양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모든 가을은 봄과 여름을 간직하고 있다.

유난히 뜨겁게 가을이 오고 있다.

반백년을 넘겨 살며 종말이 올지도 모른다는 밀레니엄이라 불리던 세기의 경계선을 넘는 흥분과 영광도 누렸다.

20세기 그리고 경계선과 21세기에도 나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함없는 순서는 수없이 반복되고 있다.


겨울과 봄, 여름을 품은 가을이 또다시 내게로 온다. 횟수를 더할수록 가을 하늘은 점점 더 예뻐진다.

언제나 예뻤던 가을 하늘.

몇 번을 더 만날 수 있을까?


아쉬우니 사족(蛇足)을 좀 더 붙여본다.

뜨거웠기에 존재하는 잔열의 소중함을 아는가?

요리를 할 때 불을 끄고 잔열로 뜸을 들이고, 물엿을 넣을 때도 불을 끄고 잔열 상태로 조리해야 한다. 남은 열을 알뜰히 사용하고 나서야 맛있는 요리가 된다.

뜨거운 불이 꺼졌다고 아쉬워말고,

다시 뜨거워질 수 없음을 슬퍼하지도 말자.

은근한 잔열까지 잘 쓰고나면 훌륭한 인생요리가 탄생한다.


백일홍도 곧 질테지.
예쁜 가을 하늘
돌아오는길. 차 창문을 열고 싶었지만..


* 사족 (蛇足) *

명사.

뱀을 다 그리고 나서 있지도 아니한 발을 덧붙여 그려 넣는다는 뜻으로, 쓸데없는 군짓을 하여 도리어 잘못되게 함을 이르는 말.




글을 너무너무 쓰고 싶은데 잘 써지지 않으니 오늘은 무엇이라도 써본다.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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