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라다오

주말농장 이야기

by 하민영


오후부터 비가 시작된다고 했는데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자동차 유리로 빗물이 부딪혀 또르르 흐르기 전에 와이퍼가 깨끗하게 쓸고 간다.

“이번 주는 주말농장 안 가도 되지 않을까?”

“그래도 가봐야지.”

“농장에 가서 할 일도 없는데 다음 주에 가자.”

“가서 풀이라도 뽑아줘야지. 풀 뽑고 김매기를 자주 해 줘야 숨구멍이 생겨서 채소들이 잘 자란단 말이야.”

나는 이번 주 농장을 한 주 쉬자고 했고, 남편은 농장에 가봐야 한다고 했다. 매주 다니는 주말농장이 가끔은 귀찮기도 하다. 연휴니까 집에서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 연휴라고 해봐야 집에서 할 일도 없는데 농장이라도 가보자’라는 마음으로 따라나섰다.


주말농장에 도착하니 비는 이슬비 정도로 바뀌었다. 그리 이른 시간도 아닌데 농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파릇파릇 돋아난 채소들을 보니 없던 힘도 생긴다. 신기하게도 초록색이 주는 안정감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다. 주말농장 방문을 망설이던 처음과 다르게 기쁨이 가득 찬다.


초록색은 평화와 안전, 중립을 상징한다고 한다. 초록색은 스트레스와 격한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균형을 잡아준단다. 초록색은 마음의 안정과 긴장 완화, 편안함을 준다고 한다. 초록색을 좋아하는 것은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 아니라 지극히 과학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니 주말농장에 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올 가을 농사는 배추, 무, 시금치, 청갓, 쪽파 이렇게 다섯 가지다. 많지 않은 채소들이 옹기종기 자라고 있는 주말농장은 오늘도 우리를 불렀다. 봄에는 이것저것 여러 종류를 심다 보니 할 일도 많았지만, 가을농사는 종류도 많지 않아서 농장을 관리하기도 편했다.

매주 주말농장을 방문하여 김매기를 해줘서인지 잔풀만 자랐다. 잔풀이라도 열심히 뽑아주는 게 좋다고 여기며 땅을 고르고 김매기를 했다. 농장에 오면 '뭐라도 한다'라는 심정이라고 해야 하나.

김매기 후에는 거름도 조금 더 줬다. 지난번처럼 호미로 살짝 땅을 파고 거름을 한 움큼씩 넣고 흙을 덮어주었다. 땅을 탔을 때 지난번에 주었던 거름이 나오기도 했다. 땅이 더 기름지라고 과하지 않은 선에서 거름을 준다.


올 가을농사는 태풍으로 늦게 시작한 데다 날씨도 너무 일찍 서늘해지고 잦은 비로 예년에 비해서 잘 자라지 않은 것 같다.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기후가 계속되고 있다. 그러니 농부라도 열심히 정성을 들여야 한다. 우리가 들일 수 있는 정성이라고 해봐야 한 주에 한 번 들여다 보고 김매기, 거름주기, 물 주기가 전부이긴 하지만 그거라도 해봐야 한다. 하기야 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지 않은가. 오늘도 우리 부부의 발자국 소리를 들은 채소들이 기뻐하며 잘 자라겠지. 음악이라도 틀어줘야 하나. 노래라도 부르고 시라도 읊을까.

잘자란 배추와 무
파릇파릇 쪽파, 시금치, 청갓


농장을 방문하여 정한 오늘의 내 임무는 모종으로 심은 배추가 잘 자라지 않은 곳에 무를 옮겨 심는 것이다. 배추 모종 중 여러 포기가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그 자리를 모두 무로 채웠다. 씨로 뿌린 무가 한꺼번에 한 곳에서 여러 개가 무더기로 자랐다. 그중 일부를 옮겨서 자라지 못한 배추 자리에 옮겨 심었다.

뵈게 자라는 무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성하게 자랄 뿐 무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 때문에 뽑아주는 것이 좋다. 드문드문 듬성듬성 자랄 때 영양도 햇빛도 골고루 받아서 잘 자란다.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채소다.

주난주에 꽃삽은 별 효용가치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꽃삽이 좋은 도구가 되어 주었다. 무를 꽃삽으로 한 삽 떴다. 흙까지 옮겨 심어야 잘 자라는데 뿌리째 쏙 뽑혔다. 물을 준 후에 무를 한 삽 뜨니 흙과 함께 무가 잘 떠졌다. 배추의 빈자리에 한 포기씩 꾹꾹 눌러 심었다. 옮겨 심는 식물들이 잘 자라지 않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을 다했다. 옮겨 심을 때마다 "잘 자라다오."라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배추는 얼마 안 되네.”

“하나 둘 셋 넷... 그래도 40포기는 되겠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네.”

“잘 자라줘야 하는데, 쓸만한 포기가 몇 포기나 될지 모르겠어.”

“무라도 잘 자라면 좋겠다. 예년에 비해서 솎아 먹을 무도 없는데 있는 거라도 잘 자랐으면 좋겠네.”


마지막 의식처럼 오늘도 물은 꼼꼼하게 땅속으로 스며들도록 충분한 시간을 갖고 여러 번 주었다.


비가 잦은 올해 날씨는 영 반갑지가 않다.

가을배추와 무가 막 자라는 시점에서는 햇볕이 반짝 나줘야 식물이 튼튼하게 쑥쑥 자랄 텐데, 비가 너무 많이 온다.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기온 현상은 올 한 해 내내 이어졌다. 봄추위와 가뭄, 여름 폭염과 폭우, 태풍, 가을 잦은 비와 낮은 온도로 농사짓기가 쉽지 않았던 해였다.

흔하디 흔한 상추는 봄부터 금추가 되었고, 추석 무렵부터 시금치, 배추, 무 등 각종 채소값이 너무 올라 주부들은 상차림을 걱정해야 했다. 최근에는 배추 수급에 차질을 빚은 김치업체들이 ‘김치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가을배추가 10월 중순 수확되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예상하는데, 현재 날씨로는 배추 작황이 어떨지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래저래 기후변화로 인한 채소 물가 걱정에 주말농장을 다녀와서도 마음은 편치가 않다.


도시 농부의 걱정과 다르게 은행잎은 점점 물들어가고 있다.



#딸아행복은여기에있단다_하민영

#간호사의우아한사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