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치히(Leipzig)는 독일 동부지역 작센주에 있는 가장 큰 도시로 인구는 약 58만 명이다. 요한세바스티안 바흐가 이곳에서 지휘와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리하르트 바그나가 탄생했다. 펠릭스 멘델스존이 마지막 여생을 라이프치히에서 보냈다. 라이프치히는 수많은 음악가 철학가 학자 등을 배출했다. 나폴레옹은 1812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를 맞봤다. 1989년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시작된 월요기도회는 독일 통일의 도화선이 되었다. BMW, 포르쉐, 지멘스 등 공장이 있으며 자동차 공업이 발달했다. 독일에서 경제적으로 잘 사는 도시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도시다.
라이프치히 여행 시작은 하루만 묵기로 한 숙소는 체크 아웃을 하고 케리어는 라이프치히역에 짐을 맡겼다. 그런데 자동 결제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다. 결제를 했는데 라커룸이 열리지 않았다. 딸이 안내데스크에 가서 직원을 데리고 와서도 해결이 안 되어 이중 결제를 했다. 이중 결제 금액은 바우처 상품권으로 돌려받았다. 결제한 금액보다 4유로를 더 받았다. 바우처 상품권은 라이프치히를 떠날 때 스타벅스에서 차를 마실 때 사용했다.
노벨상 메카 라이프치히 대학
무거운 케리어 세 개를 맡긴 후 트램을 타고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갔다.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10여 명이나 된다고 하니 라이프치히 대학을 놓칠 수 없다.
라이프치히 대학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 다음으로 오래된 대학이다. 1409년 설립되었고, 초창기에는 예술, 신학, 의학, 법학부 4개 학부로 시작했다. 현재는 14개 학부와 150여 개 이상의 학과로 구성되어 있다. 재학 중인 학생은 2만 8천여 명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건물이 파괴된 후에도 문을 계속 열 정도로 600년 동안 중단 없이 운영되었다. 이 대학 출신으로는 라이프니츠(수학자, 과학자, 철학자), 괴테(작가, 철학자, 과학자), 레오폴트 폰 랑케(근대 사학가), 프리드리히 니체(철학자), 로버트 슈만(작곡가, 피라인스트, 평론가), 리하르트 바그너(작곡가, 극작가, 지휘자), 티코 브라헤(천문학자), 게오르기우스 아그리콜라(과학자), 앙겔라 메르켈(라인강의 기적 독일총리), 미첼 바첼레트(칠레 첫 여성 대통령)등이다. 북한의 양이원형도 이 대학 출신이라고 되어있는데 그가 어떤 인물인지 검색되지 않는다. 어쩌면 라이프치히 대학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하였고, 이곳에서 독일의 문화와 경제와 역사가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년~1716년, 수학자, 과학자, 철학자) 동상이 건물의 중앙에 세워져 있다. 라이프니츠 동상 앞에서 딸에게 학자적 기가 전수되도록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건물중앙의 광장을 중심으로 빙둘러서 건물이 들어서 있다. 건물마다 이름이 붙어있다. 이름을 검색하거나 유추하여 식당, 도서관, 강의동 등을 알아냈다. 독일어 글씨를 자주 보다 보니 익숙해지고 독일어 글씨도 예쁘게 보인다. 대학교 캠퍼스는 우리나라 여느 대학의 캠퍼스와는 다르다. 아름다운 정원이나 넓은 뜰도 없고, 큰 도로도 없다. 몇 개의 건물이 아기자기하게 모여있을 뿐이다. 필자는 별것 없는 대학을 관광하는 것을 좋아한다.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고 교정을누비다 보면 젊어지고 대학생이 된 듯하여 좋다.
라이프치히를 한눈에 파노라마 타워
다음으로 향한 곳은 파노라마 타워다. 라이프치히 도시를 20여분 걸어갔다. 시내는 차량도 많지 않고 거리를 다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넓은 거리 주변으로 높지 않은 건물이 있고 간간히 솟은 높은 건물이 몇 개 보인다. 널찍한 도로에는 트램과 버스, 자동차가 공존하며 거리를 누비고 있다. 독일 여행 와서 좋은 점이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는 거다. 중앙역 주변이나 주요 관광지를 제외하면 사람이 많지 않고 붐비지 않았다.
파노라마타워로 가는 길도 한산했다. 거리 곳곳에 푸른 숲이나 잔디가 있는 공원이 있다. 독일은 공원이나 숲이 잘 가꾸어져 있는 녹지가 많다.
타워로 올라가는 입장료는 5유로이다. 기계에 동전(동전만 사용가능, 현금지참 필수)을 넣고 나면 자동으로 열리는 구조다. 기계가 낡고 오래되어 보인다. 박물관에나 가 있어야 할 것처럼 삐걱거리는 기계다. 독일은 새것과 오래된 것이 공존하는 것들이 많다. 지하철도 새것이 있는 반면 오래되어 보이는 것도 있다. 독일 사람들은 배것 보다는 오래된 것을 고쳐서 쓰는 것을 선호한다고 한다.
파노라마타워는 공간이 넓지 않았다. 관광객은 우리뿐이었다. 타워를 반바퀴 돌면서 라이프치히 시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와~ 멋진 광경이다'라는 감탄사가 나오지 않고 '시내가 이렇게 생겼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다. 흐린 날씨에 라이프치히는 고요했고 차분해 보였다. 밤에 야경이나 노을 진 저녁을본다면 다른 모습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타워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판을 보면서 어디가 어디인지 찾아보았다. 타워에는 작은 카페도 있고 식당도 있었는데 아침 11시라 그런지 문을 열지 않았다. 짧은 시간 시내전경을 내려다보고 내려왔다.
멘델스존이 마지막 여생을 보낸 집, 멘델스존 하우스(박물관)
파노라마 타워에서 나와 멘델스존 하우스로 이동했다. 거리가 멀지 않아서 걸어도 되는데 트램을 타고 갔다.
멘델스존 하우스(Mendelssohn-Haus)는 음악가 멘델스존이 여생을 보낸 집이다. 골드슈미트 거리(Goldschmidtstraße)에 있으며 멘델스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축물은 후기 고전주의(단정하고 정형화된 형식) 양식으로 지어졌다. 유럽의 일반 살림집 건축물로 보인다. 멘델스존은 1845년부터 가족들과 함께 이 건물의 2층에서 4년간 살다가 이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멘델스존이 사용했던 가구들과 직접 쓴 편지, 부엌의 집기, 그림, 사진, 메모등이 남아있다. 멘델스존은 이곳에서 19세기 최고의 오라토리오(성악의 일종으로 줄거리가 있는 곡)로 꼽히는 '엘리아스'(Elias)를 작곡했다. 엘리아스는 구약성서의 열왕기에 등장하는 선지자 엘리야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다. 헨델의 〈메시아 MessiahHWV 56〉, 하이든의 〈천지창조 TheCreation,Hob.XXI:2〉와 더불어 세계 3대 오라토리오로 꼽힌다.
멘델스존(FelixMendelssohnBartholdy,1808~1847년)은작곡가, 피아니스트로서 활동했으며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지휘자로도 유명하다. 할아버지가 은행가이고 아버지는 유명한 철학자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누나 파니 멘델스존도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으나 동생을 위해 음악을 포기했다. 훗날 동생의 이름으로 6곡의 가곡을 출판했다. 멘델스존은 16세에 <한여름밤의 꿈>을 작곡했으며, <결혼행진곡>, <핑갈의 동굴>, <찬미의 노래> 등 많은 작품이 있다.
우리나라 박물관이나 생가는 처음과 다르게 본건물 이외에 주변까지도 꽤 크고 화려하게 건축하는 것에 비해서 독일은 예전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여 유지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멘델스존 하우스 안내데스크에서 입장료(성인 1인당 10유로, 학생 8유로)를 지불하고 영어 음성안내기를 받았다. 펜을 QR코드에 대면 음성안내가 된다. 건물은 크지 않았으나 1층부터 3층까지 멘델스존과 그 가족이 사용했던 가구들이 많았다. 각층과 방마다 주제가 다르게 구성되고 색상도 특색 있게 꾸며놓았다. 멘델스존 가족 초상화도 볼 수 있다.
멘델스존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유한 생활을 해서 그런지 집에 보존되어 있는 물품도 많았다. 젊은 시절 이탈리리아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그린 그림도 인상적이었다. 삐걱거릴 거 같은 짙은 감색 나무 계단에서는 턱시도 드레스를 입은 멘델스존과 그의 아내가 걸어 내려올 것만 같다. 멘델스존 시절의 의상을 입고 사진 찍을 수 있는 코너도 있어서 딸과 엄마는 사진을 찍었다. 멘델스존과 그 가족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 작은 홀에서는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춤을 춰도 될 것 같다. 멘델스존 하우스는 바흐 박물관에 비해 볼거리가 훨씬 많아서 관람하는 재미가 있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면 작은 마당에 잔디와 나무가 있다. 주변으로는 일반 음식점과 주택들이 있다.
멘델스존은 바흐의 업적을 축적하고 보존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120여 년 앞선 바흐의 업적을 찾아 기린 멘델스존 덕분에 우리가 바흐의 음악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일요일에는 멘델스존 음악회가 열린다고 한다. 수많은 작품을 남긴 멘델스존 음악을 이곳에서 감상한다면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독일통일 기도회 시작, 성니콜라이 교회
멘델스존 하우스를 방문하고 난 후에는 전날 갔던 바흐 박물관 근처에서 점심을 먹었다. 튀김옷을 입지 않은 슈니첼, 적포도주를 소스로 사용한 스테이크, 커피,진저토닉, 오렌지슈스를 주문했다. 단 오렌지주스에 벌들이 전날처럼 날아들어 오래 앉아있지 못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고급 식당으로 팁은 10%부터 주게 되어 있어서 일반식당 5%로보다 많은 팁을 지불했다.
성토마스 교회 앞에서는 전날 찍지 못한 가족사진을 찍고, 바흐 박물관 상점에서 바흐 음악이 담긴 CD를 구매했다. 클래식을 모르지만 이제부터 친해지리라 마음먹으며 바흐 음악을 샀다. 바흐 박물관 앞에서 라이프치히역으로 가는 길에 성니콜라이 교회도 관람했다. 성니콜라이 교회는 입장은 무료이나 사진을 찍기 위해서 2유로를 지불해야 했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곳을 사진으로 담는데 2유로는 아깝지 않았다.
성니콜라이 교회(St.Nikolaikirche)는 1165년에 처음 건축되었고, 15세기와 16세기를 지나면서 후기 고딕 양식으로 완성되었다. 세 개의 첨탑은 1731년 증축하면서 바로크 양식으로 바뀌었다. 1539년 마틴 루터(1483년~1546년, 신학자, 종교개혁가)와 유스투스 요나스 1세(종교개혁가)가 설교한 곳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본교회는 1784년부터 작센주의 개신교 본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성토마스 교회와 함께 라이프치히 기독교계에서 중요한 곳이다. 교회 내에 있는 오르간은 1862년 만들어졌으며 바흐 오르간 곡이 많이 연주되었다고 한다. 1989년 9월 이 교회에서 시작된 월요기도회를 시발점으로 1990년 10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몇 명 오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매주 십만 명 넘는 사람들이 기도회에 참여하고 민주주의, 선거와 여행의 자유, 독일 통일을 요구하며 거리행진을 했다.
은은한 미색과 금색으로 장식되어 있는 내부는 차분하며, 분홍색 기둥에 연한 푸른색의 잎과 천장의 분홍 꽃장식은 튀지 않은 잔잔함이 있다. 제단에 바흐곡이 연주되는 오르간이 보인다. 길 흰색 의자가 마음의 경건함을 붙잡는다. 외관은 검은 지붕과 첨탑, 연한 미색의 벽돌이 주는 점잖은 엄숙함이 있다. 전날 거리를 지나면서 여러 차례 만났을 때는 감흥이 없다가 뒤늦게 교회의 의미를 알고 보니 저절로 숙연해진다.
라이프치히 거리 풍경과 기차
라이프치히 거리를 모습은 여상하다. 중세도시와 현대를 섞어놓은 것 같다. 거리에는 큰 개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 독일사람들은 작은 개보다는 큰 개를 좋아하는지 유독 큰 개들이 눈에 띄었다. 포토박스도 트램의 레일과 전선도 예사롭게 지나치지 않는다. 거리에 누워 자는 부랑자도 거리 여기저기에서 보인다. 거리에는 곳곳에 동상이 많았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라이프치히의 풍부한 인적자원이 표현되는 것 같아서 저절로 우쭐해진다.
의사이면서 농학자였던 테어(AlbrechtDanielThaer,1752년~1828년)와 철학자인 뮐러(JohannesPeterMüller, 1801년 ~ 1858년, 생리학자) 동상도 보았다. 독일에는 뮐러라는 동명이인이 많은데 시인 빌헬름 뮐러, 철학자 막스 뮐러가 있다. 라이프치히역 근처에는 생리학자인 페터 뮐러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뮐러 공원은 크고 넓은 공원으로 꽃과 나무, 푸른 잔디가 잘 어우러져 아름답다. 엄마가 공원이 예쁘다며 좋아하니 딸이 독일의 중앙역 근처에는 노숙자나 난민 부랑자들이 많다는 것이 단점이라고 말한다. 이곳 뮐러 공원도 라이프치히역 근처인지라 노숙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지나는 길에 딱 봐도 추레한 옷차림에 며칠 씻지 않은 덥수룩한 모습의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라이프치히역 보관소에 맡겼던 짐을 찾고 기차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스타벅스에 앉아서 커피와 음료를 마셨다. 세계 어디를 가나 스타벅스가 있다. KFC, 맥도널드도 흔히 보는 프랜차이즈다. 전날 짐 보관소 문제가 있어서 받은 바우처를 사용했다. 스타벅스에서 일하는 점원중 한 명은 한국인이었다. 어떤 연유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무척 반가웠다. 기차 출발시간이 지연되어 기다리는 동안 책을 읽었다. 유홍준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나도 좋은 여행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50여분을 기다려 ICE 고속열차에 승차했다. 좌석에 앉아있는 탑승자가 없는데 예약자리로 되어 있다. 아무래도 전산장애로 그리 된 것 같았다. 우리가 앉은 좌석 옆에 있던 독일 할머니가 설명해 준다. 독일 할머니들은 특히 친절하다. 여행 중 여러 번 독일 할머니들의 친절을 받았다. 독일에는 많은 노인들이 하릴없이 무료한 표정으로 카페나 주택의 테라스에 앉아 있는 사람도 많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종일토록 앉아서 본다고 한다. 아무 걱정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복지국가의 혜택이라 여겨지는데, 나치시절 하루종일 이웃을 관찰하고 감시하던 습관이 남아 있는 부분도 있다고 한다. 독일 노인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노인들의 모습을 생각하고, 먼 훗날 내 모습도 그려본다.
라이프치히에서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으로 기차여행
라이프치히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하는데 기차로 세 시간을 소요되었다. 저녁일정은 장을 보고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숙소는 중앙역에서 지하철(S-Hbf)로 7 정거장을 가야 했고 시내와 떨어져서 조용한 곳이었다. 투숙객이 많지 않았는지 테라스가 있는 넓은 방을 주었다. 테라스밖에서 보면 시내전경이 한눈에 들어와서 좋았다. 전날 좁은 숙소에서 한 고생을 보상받았다. 주방과 세탁기는 없었었으나 조식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방구조는 독특했는데 테라스 쪽에 방과 창문이 있고 그 안쪽에 출구 쪽으로 방이 있는데 창문이 없었다. 창이 없어서 안쪽 방은 답답하고 더웠다. 천장에 큰 선풍기가 돌아가고, 스탠드형 선풍기가 있어서 더위는 조금 식힐 수 있었다. 여행기간이 길어질수록 피로해질 것을 생각하여 조식이 제공되는 넓은 숙소를 예약했는데 나름 의미 있는 선택을 한 것 같다.
숙소에 짐을 풀고 장을 보았다. 빈병을 환급하고 저녁식사로 아시안 푸드를 선택했다. 롤김밥, 초밥, 너겟, 납작 복숭아, 샐러드, 맥주를 샀다. 독일에서 아시안푸드는 인기가 많고 비싸다. 초밥하나에 2만 원 정도 한다. 마트에는 불닭볶음면과 신라면도 있다. 우리나라 매운 면 먹기가 유행이라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냉장고가 있어서 먹거리는 푸짐하게 샀다. 저녁 9시가 되어가니 어스름 파란 어둠이 찾아왔다. 테라스 테이블에 저녁상을 차렸다. 예쁜 숙소의 안과 밖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우리 여행을 축하하는 축배를 들었다.
딸은 짜그리가 먹고 싶다고 아빠를 졸랐다. 아빠는 군대에서 먹었다는 그러나 한 번도 끓여본 적 없다는 짜그리를 끓였다. 짜그리는 엄마도 끓여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다. 짜그리 만드는 방법은 봉지에 짜파게티와 라면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먹는 음식이다. 엄마는 배가 불러 먹지 않았다. 맥주까지 한 잔 한 후라 노곤해진다. 라이프치히 여운이 다 가시지 않아서 바흐와 멘델스존의 음악을 들으며 꿈속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