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돌고 도는 Circum의 세계

라틴어 접두사 'circum'은 참으로 성실한 놈이다. 언제나 '둘레'라는 본업에 충실하면서도, 붙는 단어마다 새로운 의미의 드라마를 연출해낸다. 마치 연극 무대의 조연 배우처럼 말이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없으면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는 그런 존재 말이다. 흔히 사용되는 circumference(주변)이나 circumstance(환경) 등부터 의학용어까지 아주 다양하게 사용되는 접두시다


먼저 포경수술을 뜻하는 circumcision부터 시작해 보자. 둘례를 뜻하는 'circum'과 라틴어 'caedere(자르다)'의 과거분사형 'cisus'가 만나 문자 그대로 '둘레를 자르는 것', 즉 성기 둘레를 자르는 할례를 뜻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참으로 직설적인 작명이다. 'caedere'는 '치다, 베다, 자르다'는 뜻으로 우리가 아는 'suicide(자살)'의 '-cide' 부분도 여기서 나왔다.


Screenshot 2025-06-03 at 2.59.57 PM.png


고대 로마인들의 솔직함이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요즘 같으면 '남성 미용 케어'라는 완곡한 표현을 썼을 텐데 말이다. 완곡히 말하는 것을 circumlocution이라고 한다. 'circum'과 라틴어 'loqui(말하다)'가 결합한 말로, 빙 둘러서 말하는 것이니 완곡하게, 혹은 돌려서 말한다는 뜻이다. 'loqui'는 영어의 'eloquent(웅변의)', 'colloquial(구어의)' 등에서도 볼 수 있는 어근이다. 동사로는 circumlocuate가 되겠지만, 실제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speak circumlocutiously'라고 부사 형태로 표현한다. 말하는 것 'loqu' 대신 '쓰다'라는 'scribere'를 결합하면 어떨까? circumscribe는 'circum'과 라틴어 'scribere(쓰다, 그리다)'가 결합한 말로, 원래는 '둘레에 쓰다/그리다'에서 '경계를 정하다, 한정하다'로 의미가 발전했다. 선을 그어서 울타리를 만드는 행위가 곧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라는 발상이 흥미롭다. 어쩌면 인류 최초의 부동산 개념이 여기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톨스토이의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를 보면 주인공이 하루 종일 걸어 다녀서 둘레를 정하는 아주 원시적인 부동산 경계의 개념이 나온다. 결국 욕심이 과해서 심장마비로 죽고 마는데, 그에게 필요한 땅은 관 하나 들어갈 만큼이었다는 아이러니한 결말이다. 이렇게 둘레를 걸어다닌 것은 어떻게 표현할까?

circumambulate는 'circum'과 라틴어 'ambulare(걷다)'가 결합한 말로, '둘레를 걸어다니다'라는 뜻이다. 'ambulare'는 'ambulance(구급차)'의 어원이기도 한데, 원래 구급차는 걸어다니는 이동식 병원이었기 때문이다. circumambulate는 주로 종교적 순례에서 성지 주변을 도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들은 단순히 걷는 것이 아니라 circumambulate하고 있는 것이다. 운동으로 치면 러닝머신이 아닌 트랙 달리기 같은 느낌이다.

비슷한 단어로 circumnavigate는 'circum'과 라틴어 'navigare(항해하다)'가 결합한 말로 '둘레로 항해하다'를 뜻한다. 'navigare'는 'navis(배)'와 'agere(이끌다)'에서 나온 말로, 말 그대로 '배를 이끌다'는 뜻이다. 1519년 마젤란이 지구를 한 바퀴 돌기 시작했을 때, 그는 세계 최초로 지구를 circumnavigate 하려 했다. 물론 본인은 중간에 필리핀 막탄섬에서 라푸라푸 추장과의 전투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선원들이 대신 이 영광스러운 circumnavigation을 완성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구일주의 영웅 마젤란은 정작 지구를 한 바퀴 돌지 못했다.

또 비슷한 단어로, circumrotate는 'circum'과 라틴어 'rotare(돌리다)'가 결합한 말로 '둘레로 회전하다'는 뜻이다. 'rotare'는 'rota(바퀴)'에서 나온 동사로, 'rotate(회전하다)', 'rotary(회전의)' 등의 어원이다. 달이 지구 주위를 circumrotate 하고, 지구는 태양 주위를 circumrotate한다. 사실 우리 일상의 모든 것이 circumrotation의 연속이다.

어쩌면 인생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circumnrotation이나 circumnavigation이 아닐까? 우리는 모두 각자의 궤도를 따라 돌고 돌면서, 때로는 circumlocuation하고 때로는 circumambulate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운명이란 것이 결국 시지프스적 과업이라고 하는 것인가?


5gDhk71ZtRJtSeXYK0FVukcExAA


음 어떻게 글을 마무리할까.. 고민이 된다. circumvent해야겠다.

circumvent는 조금 다르다. 'circum'과 라틴어 'venire(오다)'가 결합한 말로, '둘레로 오다'에서 '우회하다', '피해 가다', '교묘히 빠져나가다'의 뜻이 되었다. 정면돌파 대신 옆길로 빠져나가는 모습이다.

keyword
이전 20화짐을 버리고 가볍게 여행하는 영어 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