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래정, 공간을 마신다》

A Pavilion of Floating Scent – 2025년 버전

by 매체인간

공간에는 동사가 없다.

우리는 시각에 ‘보다’, 후각에 ‘맡다’, 언어에 ‘읽다’라는 동사를 붙인다.

그러나 공간에는?

‘공간하다’라는 말은 없다.

공간은 그저 ‘있다’거나 ‘지나간다’고만 표현된다.


하지만 나는 안다.

공간은 마시는 것이다.

기억은 호흡처럼 스며들고, 온도는 혀끝에 닿고, 향은 마음의 점막을 적신다.

특히 정자에서 차를 마시는 행위는 공간을 마시는 행위와 닮아 있다.

그날, 강릉 활래정에서 나는 공간을 들이켰다.


강릉행은 두 명의 ‘반인족’과 함께였다.

초등학교 1학년과 2학년이던 재연과 이내는 그 작은 몸집으로 여름을 통째로 반사했다.

나는 그들 곁에서 여정을 안내했지만, 사실은 내가 더 많이 배웠다.

어른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풍경을 그들의 웃음이 먼저 발견했다.


무더운 여름,

선교장의 정자 그늘에서 우리는 햇볕에 패배했고,

차가운 아이스크림에 항복했다.

그러나 그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이 여름의 기억은 차가운 혀끝에서 시작되어,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활래정은 물 위에 떠 있다.

연못을 파고 그 위에 정자를 올렸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그것은 비일상적인 공간이다.

삼신산을 형상화한 인공 섬, 그 위의 소나무,

연잎들이 너울거리는 가운데 태양은 무심하게 내리쬔다.


누군가는 이 풍경을 ‘동양의 조경미’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내게 활래정은 공간의 감각이 극대화된 실험실이었다.


한 모금의 차가 혀끝에 닿는 순간,

뜨거운 기운과 연잎의 향기가 충돌했다.

마치 더위 속에서 피어나는 한 줄기 바람 같았다.

얼음을 먼저 삼키고 난 후의 차 한 잔은, 단순한 온차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의 반전이자, 공간의 반격이었다.


활래정의 조형은 도가적이다.

정자는 마루와 방, 복도와 다실이 하나의 흐름처럼 이어지고,

바깥은 누마루를 타고 연못과 대화한다.

단지 건축이 아니라, 세계를 보는 방식이다.

바깥은 풍경이고, 안은 구조다.

하지만 활래정에서는 그 두 세계가 하나의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입장료가 필요했고, 정자 안에는 직접 들어갈 수 없었지만,

우리는 정자를 ‘오르지 않고도’ 그 안에 있었다.

활래정은 그런 건축이다.

내부로 들어가지 않아도 감각이 안으로 침투하는 공간.


결국 우리는 오두막 그늘 아래에서 차살림을 풀었다.

처음엔 다들 차보다 아이스크림을 원했지만,

빙과의 얼얼함이 지나간 후,

뜨거운 차의 잔향이 입안을 지배했다.

차가 공간을 바꾼 것이 아니라,

공간이 차의 의미를 바꾸었다.


그날의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었다.

그건 연잎과 물결, 아이들의 웃음과 햇살이 섞인 여름의 정수였다.

활래정에서 나는 공간을 마셨다.

그리고 그 공간은 나를 다시 여름으로 데려갔다.


정자에 입을 대듯이 조용히 앉아,

나는 그날의 풍경을 찻잔에 담았다.

차는 식었지만 기억은 식지 않았다.

활래정은 내게 묻는다.

“당신은 공간을 어떻게 마십니까?”


그리고 나는 대답한다.

“마신다, 그리고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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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정자 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우리는 정자의 감각 안에 있었다.


차는 입에 닿았고, 연잎은 눈을 채웠으며,

햇볕은 등을 밀어 우리의 감각을 움직였다.

무더위 속에 마신 한 잔의 뜨거운 차는

그 여름의 모든 풍경을 다시 데우는 주문 같았다.


아이들은 웃었고, 나는 그 웃음을 찻잔에 담았다.

활래정은 건축이 아니라, 한 계절의 깊은 숨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공간을, 다시 마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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