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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소리 Dec 06. 2020

내가 미안해

길을 잃어 마음이 없는 사과

  나의 부모는, 그 세대는 사과에 익숙하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에게 '미안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내가 결혼을 하고 난 뒤였다. 잘못한 것에 대해 어른의 사과를 듣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삶을 산 것이다.


  성인이 되면서 강박처럼 다짐한 것이 있었다. '아이에게 사과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지'라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내 아이뿐만이 아니라 가르치며 만나는 모든 아이들에게 해당된 이야기였다. "선생님이 미안해, 내가 잘못 알았어.", "너를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 이 모든 말들은 관계에 성숙을 낳았다. 나의 사과는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그 움직인 마음은 단단한 믿음으로 성장했다. 관계가 더욱 단단해지고, 서로가 서로를 믿는 신뢰가 쌓여가면서 '우리'라는 말이 제법 어울리게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정말 그렇게 보였다.


  자녀를 낳고 나니 "엄마가 미안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게 되었다. 갓난아기가 이유 없이 울 때, 갑자기 감기나 수족구에 걸려와서 펄펄 끓는 열로 아파할 때, 엄청 아픈 아이를 품에 안고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을 때, 나는 수시로 "엄마가 미안해"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이가 자라면서 나의 사과가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 자꾸 발생되었다. "엄마! 국이 뜨겁잖아! 미안하다고 말해!", "엄마가 내 발을 치고 지나갔잖아! 미안하다고 말해!"라고 나의 사과를 요구하게 되었다. 혹은 내가 표정이 좋지 않을 때, 그저 피곤하고 졸려서 표정에 힘이 없을 때, 갑자기 아이의 사과가 튀어나왔다. "엄마 내가 미안해."


  분명히 내 사과의 시작은 '진심 어린 관계를 위한 첫 단계'였다. 권위 있는 어른의 사과는 아이에게 신뢰감을 주기 마련이니까, 나는 이러한 관계를 원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의 목적과 목표가 수단보다 앞서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진심을 바라볼 줄 아는 아이는 그 모든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걸까. 우리의 사과는 진심 어린 마음보다 '요구사항'이 되고 말았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사과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요구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은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난 그게 아닌데.', '사실은 그런 게 아닌데.', '사과하고 싶지 않아.',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데.'라는 진심이 미안하다는 말을 뒤덮었다. 어쭙잖은 사과의 말들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나에게 남편은 슬그머니 이야기했다. "차라리 고맙다고 말해."


  어차피 나는 길을 잃었다. 수많은 사과의 미로 속에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무엇이든 붙잡고 나아갈 것이 필요했다. 나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정말 그러했다. 남편의 말을 신뢰해서 실천한 것이 아니라, 다른 뾰족한 수가 없어서 실천했다. '미안해' 보다 '고마워'를 선택했다. "엄마가 너랑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서운했을 텐데, 엄마를 이해해 주고 받아줘서 고마워. 그리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정말 미안해."라고 말이다. 물론 습관처럼 튀어나온 나의 사과는 '고맙다'는 말에도 함께였다. 그러나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나는 고마운 이유를 찾아야 했다. 말을 해야 하는 나부터 납득해야 했다. 고민하고 생각한 이유들은 아이들의 마음을 만져주는 역할을 해내었다. 결국 마음이었다.


  사과의 말이든 감사의 말이든 내 언어에는 진심, 마음이 빠져 있었다. '내가 미안했어.'라고 하는 말은, 뒤집어 속내를 꺼내보면 '나는 빨리 이 불편한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어.', '내가 미안해, 그러니까 그만해.'라는 말이었다. 진심 어린 마음보다, 사과함으로 얻게 될 이후의 결과가 더 중요했다. 그러니 나의 사과가 아이들에게 더 이상 먹힐 리 없었다. 고맙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 말을 하려고 하니, '대체 왜 고마워?'라는 이유를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하고 고민해서 스스로 질문에 답했다. 그런데 그러한 이유들이 아이의 마음에 가닿게 된 것이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동안 수없이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왜 사과해야 하는지' 조차 생각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럴 바엔 나의 부모처럼, 그 세대 어른들처럼 아예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진심 어린 관계를 갖고 싶어 하지만 진심을 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정말 친밀하고 따뜻한 관계를 맺고 싶어 했지만, 마음을 다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만 그럴듯하게 사과하고, 그럴듯하게 좋은 엄마처럼 비치고 싶어 했다. 그런 진짜 모습을 아이가 모를 리 없었다. 백 마디 말을 내뱉기 전에, 마음을 먼저 보여줘야 함을 깨닫는다. 이미 나의 눈빛에서, 손짓에서, 분위기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그 마음이 전해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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