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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했던 나르시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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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긴이

키를 훌쩍 넘는 통창문 너머로 서울 도심이 보인다. 그런 경치를 품고 있는 음식점은 대체로 사람이 붐비기 마련이다. 내가 지금 일하는 곳도 그렇다. 가족 외식, 회식, 중요한 미팅, 분위기 내고 싶은 연인들. 이곳에 일하면서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바쁘다는 것이다. 출근하자마자 정신 없이 가게 오픈 준비를 한다. 업장이 크다 보니, 준비해야 할 것도 많다. 매일 수많은 직원들이 각자 맡은 업무를 해내고 있다. 그 속에서 나도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퇴근 때까지 어떠한 잡념도 없이 오로지 눈 앞에 주어진 일을 한다. 근 시간은 저녁 아홉 시, 만약 아홉 시가 되었는데도 일을 더 하려고 하면 모두가 튀어 나와 뜯어 말린다. 참, 멋쩍으면서 고마운 일이다. 실 상식적인 일인데, 이 순간이 왜 이렇게 소중하게 느껴질까.


지난주 처음으로 심리상담을 해봤다. 조용하고 나긋한 방에서 상담이 진행되었다. 상담 선생님의 첫 질문은, 지금 어떠세요, 였다. 나는 긴장되고 심장이 평소보다 더 뛰고 있다고 답했다. 선생님은 이유를 물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상담이 처음이기도 하고, 어떤 얘기를 해야 되는지 걱정되기도 하고, 그리고 지금 이 상담실 있는 지역이 전 회사 업무 때문에 자주 들렸던 곳이라, 그때 클라이언트랑 안 좋은 기억도 있고, 전 회사랑 연관이 있다보니, 그것도 영향이 있는 거 같아요."

"그러셨군아, 충분히 그럴만 해요."


선생님은 차분하게 나의 주절거림을 들어주셨다. 우리의 대화가 순조롭다고 느껴졌다. 선생님은 상담을 신청한 이유를 물었고, 나는 내 증상을 말했다.


"매일 심장이 뛰고 불안해요. 계속 그 새끼랑 싸우는 상상을 하거든요. 그 새끼가 제게 지껄였던 것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상상을 매일해요."

"매일 싸우는 상대방은 누구죠?"

"학교 선배이자, 가장 친했던 사람이자, 저와 함께 사업을 했던 사람이예요. 지금은 노동청에 임금체불로 신고해서 싸우고 있어요. 처음엔 공동사업자로 시작했다가, 3년 전 쯤 무슨 계약 문제 때문에 자신이 단독 대표가 되어야 한다 해서, 동의를 하고, 저는 직원으로 들어갔어요. 4대 보험도 가입하구요. 그런데 그 이후로 저를 대하는 태도가 점점 변했어요. 마치 아랫사람 대하듯 하더라구요. 저는 그 새끼 밑에서 공동사업자라고 가스라이팅 당하면서 일은 개같이 했는데, 그 새끼는 돈은 돈대로 안주고 제 근로자성을 인정도 하지 않고, 근로감독관한테는 동업자라고 우기면서.. 머리가 지끈거리는 상황이예요."

"너무 곤란한 상황이겠네요."


그녀의 말에 나는 숨이 막혔다. 그녀의 탓은 아니었다. 그날이 떠올랐다. 매일 꿈에서 반복되던 그날의 대화. 나의 말은 도통 그에게 닿지 않았고, 융단폭격처럼 쏟아졌던 그의 말들. 그것들은 역겨운 그의 눈물과 함께 나의 심장에 마구 꽂혔다. 일방적인 대화는-아니, 이걸 대화라고 명해도 될까-가슴을 꽉 조여왔고, 손발을 벌벌 떨게했다. 더 이상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상념은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상념과 나는 별개의 존재인 걸까. 그것은 나에 포함되지 않는 영역인가. 그날의 기억 일부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뱉었다. 상담 선생님은 중간 중간 미간을 찌푸리며 이야기를 들었다.


"트라우마네요."

"네?"

"그때 겪으신 일이 트라우마가 됐어요. 정말 힘드셨겠어요."


트라우마, 어린 시절 숨박꼭질을 하다 눈에 들어간 솔잎이 전부였는데, 서른이 넘은 나에게 새로운 트라우마가 생겼다니. 그새끼한테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걸까.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한 숨이 나오다 말고 목구멍을 막는다. 아직은 그날과 마주할 수 없다.


스물 다섯 살, 고깃집은 많은 인파로 시끄럽다. 지방에 작은 대학교, 사진영상학과의 개강파티하는 날, 설레는 마음으로 온 1학년부터, 귀찮지만 공짜 술을 마시러 온 4학년까지 이십 대 청춘들이 한껏 취해있다. 나도 오랜 휴학을 마치고 돌아온 복학생으로서 한 자리 맡고있다. 캠퍼스 커플의 꿈을 안고 여자 후배들이 모인 자리에 앉아서 있는 척 없는 척 가진 폼을 다 잡고 있다. 그러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스물 다섯 살의 나는 주정을 부리기 시작했고, 내가 앉은 자리에는 사람이 하나둘 씩 떠났다. 결국 남은 건 나와 같은 땀내 나는 복학생들이었다.


"어?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지난번에 학교 앞 술집에서 한 번 뵀었는데, 또 뵙네요."

"네? 저 아세요?"


그와 나눈 첫 대화였다. 분명 어두컴컴한 술집에서 다른 선배들과 술을 먹다 나와 마주쳤다. 심지어 잠시 그 자리에 함께하기도 했는데, 그는 나를 처음 만난 듯 대했다.


띵동. 직원 호출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나는 차분하지만 신속하게 벨이 울린 테이블로 다가갔다. 손님은 나를 본 척 만 척하면서 손가락으로 빈그릇을 가리켰다. 나는 반찬을 더 원하는지 물었다. 그때서야 그 사람은 나를 올려다보며, 깍두기, 라고 말했다. 깍두기를 더 달라는 것을 왜 이렇게 어렵게 말하는 걸까. 이곳에서 일하다 보면 별의 별 사람을 마주하는 것 같다. 그런 만남이 쌓이다 보면 이런 사소한 일도 괜히 마음이 쓰이고 짜증이 난다. 깍두기를 더 채워서 테이블에 올려 놓는다. 맛있게 먹으라는 말도 없이 휙 돌아섰다. 동료가 내게 다가와 어깨 살짝 토닥인다.

"관상은 과학이라잖아요. 생긴 거 봐요. 저 따위로 안 굴면 오히려 이상하다니까요."


어이없는 논리였지만,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를 보며 아까보다 더 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도 장난스러운 웃음으로 화답해 주었다. 어쩌면 당연하고도 사소한 일상이지만, 이 순간이 왜 이렇게 고마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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